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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술 맹세, 헛 맹세
그래도 어쩌랴 이밤이 아름다운 것을
  • 입력날짜 : 2005. 09.22. 10:42

추석 연휴를 지내고 오전에 평소 자주 찾는 어느 사무실에 들렀다.
손으로 아랫배를 잡고 허리를 구부린 채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사람, 구겨진 인상을 하고 엉거주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사람, 연휴 동안에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속이 쓰리고 아픈 모양들이다.

아마 그들의 마음속엔 “이젠 다시 술을 마시나 두고봐라. 어제 저녁 마신 술이 마지막 술이 될 테니까.”하는 단단한 각오가 뇌리에 꽉찼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나 역시 그들과 같은 입장이다.
아닌게 아니라 내 속도 편하지 않은 것을 느꼈다.
무지근히 아프고 쓰리다.

북어국이라도 한 그릇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무의식중에 손이 배 위로 올라갔다.
술은 적당히만 마시면 스트레스도 풀리고 순환도 원활해 백약지장(百藥之長)이라고 했는데 그 적당히가 문제인 것이다.
술의 욕심보는 달리 있는 성 싶다.

술상 앞에 앉으면 시장 다녀오시는 엄마를 만난 아이들마냥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그리고 받은 술잔을 앞에 놓고 우두커니 앉았거나 조금조금 맛을 음미하지 못하고 단숨에 쭉 들이마시는 버릇이 있다.
거기다가 주는 잔을 뿌리치지 못하고 반가이 받는 예의까지 갖추었으니 잔이 자주 돌아올 수밖에 없는 일이다.
또 있다. 술 맛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마시는 주벽. 청탁불고다.
그쯤 되었으니 뒷날 아침의 후회는 어찌 이루 다 말을 하겠는가.

그러나 한가지 예외는 있다.
하루전 과음을 한 다음날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술을 못마시겠더라는 것이다.
나를 아는 지인들 중엔 이러한 내 모습이 영 마땅찮은 모양이다. 그래도 어쩌랴 속이 거부하는 것을…….
내공이 부족한 탓이리라.

얼마 전 그리 오래지 않은 여름날.
서쪽하늘이 불그스럼하게 노을이 지던 때, 아는 형님이 오랜만에 술 한잔 하자며 나를 부른다.
어제 마신 술이 아직도 뱃속에 남아있는데 이를 거절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중에 “물수건 몇 개 준비시키면 되냐?”고 앞서나간다. 역시 고수다.

그 자리에 내가 좋아하는 지인도 나온다길래 어쩔수 없이 나갔다.
술이 웬순지 그 사람이 웬순지……. 한편 기쁘기도 하고 반가운 마음에 한걸음에 일단 가 보기로 했다.
모처럼의 만남이라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푸짐한 술상이 차려져 나왔다.
체면불고다.

주종은 23도 소주, 권커니 받거니 몇 순배 돌고나니 취기가 감돌고 몽롱해졌다.
“그래, 바로 이런 맛에 술을 마시는거야. 건강이 될 때 술을 마시자!”
네 명이 의기투합 한 탓에 자리를 옮겼다. 이번엔 맥주다. 또 옮겼다. 이번에는 생맥주다.
두 사람은 나가 떨어졌고 나와 지인 한 사람만이 남았다. 둘 다 술의 마력에 걸려 황홀경에 빠졌다.

후에 늦은시간에 또 한 사람이 동석을 했다.
세 명이서 술을 마시며 인생을 논했다.
‘취중진담’이라고 술 마시며 주절주절 읊조리는 말 속에 진실이 담긴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래도 어쩌랴! 이 밤이 아름다운 것을.
취중에 욕심의 근성이 더 크게 발심해 술잔이 돌아오는 대로 꼴깍꼴깍 마셨다.
아마 그러고는 곧 내 평소 실력에 못 미쳐서 의식을 잃었던 것 같다.

아침에 눈을 뜨니 속이 뒤집히고, 목이 마르고, 머리가 터질 듯이 아프다.
가만 있자, 여기가 어딘가? ‘아뿔싸! 이거 큰일 났구나’ 차 안에서 자고 있는 게 아닌가.
어젯밤 고주망태가 되어 실수는 안했는지 이럴땐 정말 황당하기만 하다.
누군가 차 창문을 두드린다. 어젯밤 밤새도록 술마신 그 지인이 아닌가.

‘이런, 이 양반 출근길인가 보군’ ‘여기서 잠이 들다니…….’ 후회한 들 어쩌랴. 어쨋거나 일어나고 볼 일이다.
달리는 차 안에서 생각해 본다. “술은 생사불고라고 흔히 말하지만 그것은 마실 때 기분일 뿐이고 다음날 아침에는 전연 다른 법이다.”라고.
그날 아침만큼 술을 끊겠다는 맹세를 단단히 한 예는 전에는 없었던 것 같다. ‘술 맹세’, ‘헛 맹세’.

하기야 생각대로 모두가 술을 끊으면 저 많은 술집과 종업원들은 무슨 짓을 해 먹고 살겠나?
각종 주조회사와 사원들의 생계는 다 어쩌려고.
그 뿐인가. 나라 살림에도 큰 타격이 올 것 아니겠는가.
그러고 보면 나같은 술꾼들은 경제사업에 크게 한 몫을 하는 셈이 되니 떳떳하기도 한 일이다. 핑계라면 핑계이겠지만.

애주가(愛酒家)는 술의 정을 아는 사람, 음주가(飮酒家)는 술의 흥을 아는 사람, 탐주가(貪酒家)는 술에 젖어 빠진 사람들이고, 미주가(味酒家)는 술맛은 감별해도 정이나 흥을 알지 못한다는 윤오영 선생이 한 말이 기억난다.
술에 얽힌 사연이 얼마나 많은가.
그 사연 속에는 정과 흥과 멋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술을 마다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만큼 버릴 음식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두고 봐라. 오늘부터는 술을 딱 끊겠다” 하는 맹세가 술 마신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드는데 앞으로 또 얼마나 더 많은 맹세를 해야 할지…….
술 맹세, 헛 맹세.



윤광룡 기자 ykyong@morningnews.or.kr         윤광룡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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