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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경주 최부잣집 이야기
  • 입력날짜 : 2014. 01.07. 11:57
1671년 현종 신해년.
삼남에 큰 흉년이 들었을때 경주 최부자 최국선의 집 바깥 마당에서는 큰 솥이 걸렸다.

“모든 사람들이 장차 굶어죽을 형편인데 나 혼자 재물을 가지고 있어 무엇하겠느냐. 모든 굶는 이들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해라. 헐벗은 이에게는 옷을 지어 입혀라.”

“ 돈을 갚을 사람이면 이러한 담보가 없어도 갚을 것이요, 못 갚을 사람이면 이러한 담보가 있어도 못 갚을 것이다. 돈을 못 갚을 형편인데 땅 문서까지 빼앗아버리면 어떻게 돈을 갚겠느냐. 이런 담보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겠느냐. 땅이나 집문서들은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고 나머지는 불태우거라.”

경주 최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을 쓴 경제학자 전진문 박사는 최부잣집이 흉년때 경상북도 인구의 약 1할 정도에 이르는 사람들에게 구휼을 베풀었다고 추산했다.

이 가문은 조선조 중엽 임진왜란, 병자호란이 휩쓸고 간 참화 위에서 농지를 개간해 만석꾼의 지위를 이룩한 뒤 10여대 300여 년 동안 이 부(富)를 현명하게 지켜온 역사에 이름을 남긴 집안이다.

최부잣집의 부가 과연 몇 대나 지속될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9대 만석꾼설, 10대 만석꾼설, 12대 만석꾼설 등 대략 3가지가 있다.

최부잣집에서는 부를 일군 후에도 집안 대대로 근검절약을 근본으로 삼되 가난한 이와 손님들을 후대했다. 또한 과도하게 재산을 늘리지도 않았다.

집안의 전통으로 실행하는 선행으로 이 가문은 동학혁명이나 기타 민란때에도 화를 당하지 않았다.

최진립의 11대 손인 최준은 나라를 이끌고 갈 인재를 양성한다는 목표를 위해 대구대학을 세웠다. 그 뒤 남은 재산은 털어 계림대학도 세웠다. 경주 최부잣집 300년의 부는 사실상 모두 교육사업으로 승화되었다.

최부잣집에는 6개조 가훈(家訓)이 있었다.

과거를 보되 진사이상은 하지 마라.

상민으로서는 부나 가문을 일구기가 어렵다. 교육을 받지 않아도 그렇다. 그러나 권세의 자리에 있음은 칼날 위에 서 있는 것과 같아 언제 자신을 베일지 모른다.

재산은 만석 이상을 지니지 마라.

이 상한선을 지키기 위해 후손들은 욕망을 억제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소작률을 낮추게 했고 가문의 부가 가문 밖으로 퍼져나가 그 덕이 쌓여 가문의 방파제가 되도록 한 것이다.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과객은 침식을 제공받았으며 떠날 때 양식과 노자도 얻어갔다. 매년 약 1천석이 과객 접대에 사용되었으며 이는 수입의 1/4이었다.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마라.

부를 쌓는 과정에서 남의 불행을 악용하지 않는다는 근본주의적 원칙이다.

며느리들은 시집온 뒤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이런 교육을 받은 며느리는 결코 낭비하지 않는다.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실제 11대조 최현식 대에는 가문이 활빈당의 무장공격을 받았지만 누대에 걸친 선행 덕에 무사했다.


이삼순 칼럼위원 sslee@koje.ac.kr        이삼순 칼럼위원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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