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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모닝뉴스 &gt; 칼럼</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section.html?section=16</link>
<description>모닝뉴스</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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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논평] 개혁 대통령에서 국민의 대통령으로</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78970743987792016</link>
<description><![CDATA[이재명 대통령의 오늘 기자회견은 국민에게 한발 더 다가서겠다는 성찰의 메시지로 시작했다. 지방선거 이후 국민의 실망과 우려에 대해 “모두 저의 부족함 때문”이라며 배려와 섬세함, 소통, 국민에 대한 존중이 부족했을 수 있다고 했다. ‘언제나 국민이 옳다’는 말도 거듭했다.

대통령이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국민의 목소리를 더 듣겠다고 한 것은 당연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일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기자회견은 반성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자신을 ‘개혁 대통령’으로 규정했고 검찰개혁을 비롯한 사회대개혁을 흔들림 없이 추진하겠다는 뜻도 분명히 했다. 1987년 헌법을 시대에 맞지 않는 헌법으로 규정하며 개헌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여기서 대통령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b>개혁의 방향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개혁의 방식이 아닌가.</b>

국가는 대통령의 철학을 실현하기 위한 조직이 아니다. 대통령 역시 헌법과 법률이 정한 권한을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사람이다. 대통령이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가 곧 국가가 따라야 할 가치가 되는 순간, 개혁은 국민을 위한 제도 개선이 아니라 대통령의 세계관을 제도화하는 일로 비칠 수 있다.

대통령에게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국정철학을 공유하고 대통령의 정책을 제대로 이해하는 참모도 필요하다. 그러나 믿을 만한 사람만 곁에 두면 대통령의 귀에는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들어올 수 있다.

내 생각과 같은 말이 옳은 말은 아니다.

오히려 대통령에게 필요한 사람은 대통령의 생각을 잘 이해하는 사람과 함께 대통령의 생각에 틀린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것이 인사의 탕평이고 국정의 균형이다.

오늘 회견에서 민주주의와 진보, 개혁을 함께 추구한 사람들을 두고 “모두 친문이고 친노이며 친김대중이고 이재명의 동지들”이라고 표현한 대목도 아쉽다.

정치적 맥락에서는 당내 갈등을 봉합하고 서로를 배척하지 말자는 취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의 자리에서는 다르게 들릴 수 있다.

대통령은 정당의 대통령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김대중을 기억하는 국민도 국민이고 노무현을 기억하는 국민도 국민이다. 문재인 정부를 지지했던 국민도 국민이고 그들과 다른 역사적 경험을 가진 국민도 국민이다.

국민이 특정 정권이나 이념에 매몰돼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b>국민의 생각은 세뇌의 결과가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삶과 시대의 경험에서 만들어진 것이다.</b>

산업화의 기억도 대한민국의 역사이고 민주화의 기억도 역사다. 어느 정부에 대한 지지와 실망도 모두 역사의 일부다. 역사는 과거와 단절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과거를 기억하되 과거에 갇히지 않는 것, 그것이 역사에 대한 존중이고 포용이다.

그래서 새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국민에게 과거를 잊으라고 설득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진 국민이 어떤 미래를 함께 만들어갈 것인지 보여주는 일이다.

사법개혁도 같은 기준에서 봐야 한다.

개인의 경험이 제도의 문제를 발견하는 계기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개인이 겪은 일이 곧 국가 전체의 제도적 문제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대통령 자신의 경험과 국가의 시스템은 분리해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개인의 억울함을 국가의 제도적 억울함으로 확대해서도 안 되고, 개인의 정치적 신념을 국가 시스템의 기준으로 삼아서도 안 된다.

개혁은 제도를 없애는 일이 아니다.

문제가 있는 곳을 찾아 고치는 일이다.

병든 가지가 있다면 가지를 잘라내야 한다. 병든 가지 하나를 보고 나무 전체를 없애는 것이 개혁일 수는 없다.

새로운 제도를 만든다고 문제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제도를 운용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잘못된 제도가 있다면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찾아 고치고, 그 과정에서 권력이 오남용되지 않도록 견제 장치를 함께 만드는 것이 제도개혁의 본래 목적이어야 한다.

<b>모든 제도는 국민의 자유를 넓히기 위해 존재한다.</b>

국민이 제도 때문에 부득이하게 감당해야 하는 것을 최소화하고, 제도가 국민에게 더 많은 선택과 자유를 돌려주는 방향이어야 한다.

물에 비친 달을 진짜 달이라고 생각해 물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아서는 안 된다.

제도가 목적이 되는 순간 국민은 사라지고 제도만 남는다.

개헌도 마찬가지다.

이 대통령은 오늘 개헌에 대해 “대통령이 하는 것이 아니라 국회와 국민이 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 자신은 연임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거듭 밝혔다.

그 말 자체는 분명하다.

다만 ‘연임할 생각이 없다’와 ‘개헌으로 연임이 가능해져도 연임하지 않겠다’는 말에는 정치적 의미의 차이가 있다.

전자는 현재의 의사이고 후자는 미래의 선택에 대한 약속이다.

대통령이 정말 개헌을 국가의 미래를 위한 일로 생각한다면, 개헌의 혜택이 자신에게 돌아가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다음 대통령부터 적용될 국가의 규칙을 만드는 일이라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이 개헌의 중심에 서는 순간 개헌은 국가의 미래를 위한 논의에서 현직 대통령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관한 논쟁으로 옮겨갈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오늘 회견에서 대통령이 보여줘야 할 가장 큰 변화는 개혁의 강도를 높이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개혁의 중심에서 대통령 자신이 조금 더 내려오는 것이다.

대통령이 모든 것을 설계하고 국민에게 설명하고 설득하는 나라보다 국민이 요구하고 전문가가 검증하며 국회가 논의하고 행정부가 집행하고 사법부가 견제하는 나라가 더 오래 간다.

<b>대통령이 옳기 때문에 작동하는 시스템보다 대통령이 틀렸을 때도 작동하는 시스템이 더 강한 국가다.</b>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철학을 국가에 남기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떠난 뒤에도 국민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제도를 남기는 일이다.

‘국민은 언제나 옳다’는 대통령의 오늘 말이 진정한 국정철학이 되려면 그 말은 선언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국민이 대통령의 생각에 동의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 국민의 생각을 들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

내가 아니어도 국민이 원하는 결대로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놓는 것.

그때 비로소 ‘개혁 대통령’은 ‘국민의 대통령’으로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다.]]></description>
<author>모닝뉴스 기자</author>
<pubDate>Fri, 18 Sep 2026 13:57:19 GMT</pubDate>
</item>
<item>
<title>[칼럼] 국민에게 빨대를 꽂는 국가는 안 된다</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78953520887778016</link>
<description><![CDATA[대통령의 지지율을 살리는 가장 쉬운 방법은 감언이설일지 모른다. 국민이 듣고 싶은 말을 하고, 오늘의 불만을 내일의 희망으로 포장하면 된다.

그러나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가 해야 할 일은 그것이 아니다.
돌팔매를 맞더라도 국민에게 필요한 길이라면 그 길을 설명하고 가야 한다.
대한민국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일제의 강압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있었고, 전쟁의 폐허에서 다시 일어섰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땀을 흘렸고 산업화를 일궜다. 민주화를 위해 피를 흘렸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누군가의 감언이설로 만들어진 나라가 아니다.

일하고 견디고 싸우며 다시 일어선 사람들이 만든 나라다.
그런 대한민국에서 지금 필요한 것은 국민이 듣기 좋은 말이 아니다. 국가가 국민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정직한 답이다.

나는 요즘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고 있는가, 아니면 국민 생활 곳곳에 빨대를 꽂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사행산업이 그렇다.
우리 법은 카지노·경마·경륜·경정·복권·체육진흥투표권·소싸움경기 등 7개 업종을 합법적인 사행산업으로 규정하고 있다. 동시에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를 통해 매출총량제와 이용자 보호, 도박중독 예방 등의 정책을 시행한다.

반면 허가받지 않은 도박과 불법 사행행위는 처벌 대상이다.
같은 사행성이라도 법이 허용하면 합법이고, 법이 금지하면 불법이다.
법치국가에서는 당연한 구분이다.
그러나 여기서 국민이 묻는 질문도 있다.

국가는 국민의 사행심을 어디까지 허용하고, 어디서부터 막아야 하는가.
국가가 사행산업을 제도적으로 관리하는 것과 국민의 사행심을 부추기는 것은 다른 문제다. 적어도 국민의 삶을 지키는 국가라면 이 경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생활 속 행정도 마찬가지다.
각종 법규 위반에 따른 과태료와 범칙금은 법률에 근거한 제도다. 과태료는 세금이 아니라 행정상 의무 위반에 대한 제재다.

문제는 제도의 취지가 아니라 국민이 행정을 어떻게 경험하느냐다.
위반을 찾아내고 돈을 걷는 행정은 눈에 잘 띄지만, 국민이 실수하지 않도록 미리 알려주고 제도를 이용할 수 있도록 돕는 행정은 상대적으로 눈에 띄지 않는다.

그래서 행정이 어느 순간 국민을 돕는 행정이 아니라 국민에게 돈을 걷는 행정처럼 보이기 시작한다면, 국가가 먼저 돌아봐야 한다.

국민에게 제도를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국민이 그 제도를 이용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일이다.

자격제도도 그렇다.
의료·법률·회계처럼 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분야에 전문자격을 요구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모든 영역에서 자격과 시험, 허가를 계속 늘려 일하려는 사람의 진입을 막는다면 자격제도의 본래 목적을 다시 물어야 한다.

전문성을 보호하는 제도와 기회를 독점하는 제도는 같지 않다.
국가는 국민이 할 수 있는 일을 늘려야 한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국가가 필요한 서비스를 연결하고, 제도를 몰라 권리를 포기하는 사람이 없도록 공무원이 안내해야 한다.

세금을 받는 공무원이 국민의 손과 발이 되는 행정이다.
그것이 복지국가의 모습이어야 한다.
공공기관도 예외가 아니다.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기관이라면 왜 필요한지, 민간이나 다른 행정기관으로 대체할 수 없는지, 특정 분야에 법률상 우월적 지위를 부여할 이유가 있는지를 끊임없이 따져야 한다.
기관을 만드는 것은 쉽다.
없애는 것이 더 어렵다.

그러나 국민에게 필요하지 않은 기관이라면 없애는 것도 국가의 책임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작은 정부냐 큰 정부냐가 아니다.
국민에게 필요한 정부냐 아니냐의 문제다.

국민에게 돈을 걷는 정부보다 국민이 돈이 없어서 권리를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정부.
일하고 싶은 사람이 일할 수 있도록 기회를 넓히는 정부.
전문성이 필요한 곳에서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하고, 그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에게는 국가가 빈틈을 메워주는 정부.

모든 국민이 부자가 되지 않아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나라.
나는 그런 나라를 보고 싶다.
그래서 대통령에게 감언이설을 바라지 않는다.

지지율을 위해 국민이 듣고 싶은 말만 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때로는 국민이 싫어하는 말도 하면서 바른길을 설명하는 지도자를 보고 싶다.
돌팔매를 맞더라도 가야 할 길이라면 가는 지도자다.

대한민국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그냥 얻은 나라가 아니다.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났고,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어섰으며, 산업화의 땀과 민주화의 피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그 자유와 민주주의를 다시 표를 얻기 위한 정치의 기술 로 소비해서는 안 된다.
다수당이 국민의 목줄을 쥐고, 정권이 여론을 관리하고, 국민은 다음 선거를 기다리는 정치로는 부족하다.

국민은 정치의 고객이 아니다.
국가의 주인이다.
지도자는 표를 얻기 위해 국민에게 희망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국민에게 필요한 길을 찾고 그 길이 왜 필요한지 설명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다.

국민에게 빨대를 꽂는 정부가 아니라 국민에게 길을 내주는 정부.
특권을 줄이고, 기회를 넓히고, 돈이 없어도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하는 정부.
무엇보다 국민에게 거짓 희망을 팔지 않는 정부.

대통령의 지지율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감언이설이 아닐 것이다.
국민이 ‘이 정부는 나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느끼게 하는 것.
그것이 오래가는 정부의 시작이다.]]></description>
<author>모닝뉴스 기자</author>
<pubDate>Wed, 16 Sep 2026 14:06:48 GMT</pubDate>
</item>
<item>
<title>[칼럼] 권력은 누구를 위해 주어지는가</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78935126987767016</link>
<description><![CDATA[권력의 문제는 무엇을 할 수 있느냐에 있지 않다.
그 권한을 누구를 위해 사용하느냐에 있다.

대통령에게는 막강한 권한이 주어진다. 법률에 따라 장관을 임명하고, 국가의 정책 방향을 정하고, 국민의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내린다. 그러나 그 권한이 대통령 개인의 것이 아니라는 데 정치의 출발점이 있다.

권력은 위임된 것이다.

모세를 떠올려본다.

모세에게 주어진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는 사명이었다. 그에게 능력이 있었다고 해서 그 능력이 모세 자신의 것은 아니었다. 사명에는 목적이 있었고, 그 목적에는 때가 있었다.

모세가 자신의 판단과 분노만으로 움직였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권한을 받은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권한의 목적보다 앞세우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반대편에는 람세스가 있다.

왕의 권력은 왕에게 속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권력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믿는 순간, 권력은 섬김의 수단이 아니라 지배의 도구가 된다.

진시황도 다르지 않다.

천하를 통일한 권력은 결국 자신의 생명까지 연장하려는 욕망으로 향했다.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서복을 보냈다는 이야기는 역사적 기록과 후대의 전승이 섞여 있지만, 적어도 ‘불멸을 꿈꾼 황제’라는 상징은 오랫동안 남아 있다. 천하를 얻은 권력이 마침내 자신의 생명을 위해 움직이는 순간이다.

권력은 그렇게 변한다.

처음에는 사람을 위해 주어진 권한이 어느 순간 권한을 가진 사람 자신을 위해 사용된다.

오늘의 정치도 이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의 장관 후보자 지명을 둘러싼 논란을 보면서도 먼저 물어야 할 것은 특정 후보자를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가 아니다. 대통령이 가진 인사권을 어떻게 행사했는가 하는 문제다.

지난 8월 30일 단행된 개각에서 김승원 법무부 장관 후보자와 용혜인 성평등가족부 장관 후보자 등이 지명됐다. 이후 두 후보자를 둘러싼 여러 의혹과 자격 논란이 이어졌고, 정치권의 공방도 커졌다.

후보자 개인에 대한 사실관계와 법적 판단은 별개의 문제다. 청문회와 검증 절차를 통해 가려야 한다.

그러나 대통령의 책임까지 별개의 문제로 볼 수는 없다.

인사권은 대통령에게 주어져 있지만, 대통령을 위해 주어진 권한은 아니다. 국민을 위해 좋은 사람을 찾아 국가의 일을 맡기라는 권한이다.

그래서 인사는 곧 통치철학이다.

어떤 사람을 쓰느냐는 어떤 국가를 만들겠다는 것인지 보여준다. 무엇보다 그 사람의 능력만이 아니라 공직자로서의 신뢰와 책임, 국민 앞에 설 수 있는 도덕적 기준까지 함께 살펴야 한다.

검증이 충분했는가.

정권에 필요한 사람을 찾은 것은 아닌가.

국민에게 필요한 사람을 찾았는가.

이 질문은 어느 정권에나 동일하게 적용돼야 한다.

정치는 결국 말로 시작하지만 말로 완성되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정책을 내놓아도 국민의 삶에서 결과로 확인되지 않으면 정책은 구호에 머문다. 선거를 앞두고 국민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골라 내놓는 것은 쉬울 수 있다. 그러나 이미 효과가 없다는 것이 드러난 처방을 계속 바꿔가며 내놓는다면 그것은 정책이라기보다 정치적 처방전에 가깝다.

권위도 마찬가지다.

권위는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권한을 가진 사람이 그 권한을 내려놓고 국민을 위해 사용할 때 생긴다.

모세에게 권위가 있었다면 그것은 모세를 높이기 위한 권위가 아니었다.

정치 지도자에게 권한이 있다면 그것 역시 지도자를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권력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일이다.

권력을 사유화하는 순간 지도자는 왕을 닮는다.

국민에게 위임받은 권한을 국민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 순간, 민주주의의 외형은 남아 있어도 권력의 본질은 달라진다.

정책은 사람을 위해 존재하고, 인사는 국가를 위해 존재하며,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와 국민에게 돌아가야 한다.

결국 정치가 답해야 할 질문은 하나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누구를 위해 쓰고 있는가.

권력의 크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권력의 방향이다.

그리고 그 방향을 잃는 순간, 권위는 권력이 되고 권력은 욕망이 된다.]]></description>
<author>모닝뉴스 기자</author>
<pubDate>Mon, 14 Sep 2026 11:01:09 GMT</pubDate>
</item>
<item>
<title>[칼럼] 청문회 뒤에 숨을 수 없는 인사</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78891871587749016</link>
<description><![CDATA[김승원·용혜인 장관 후보자 논란, 결국 묻는 것은 이재명 정부의 인사검증이다

장관 후보자를 둘러싼 논란이 커질 때마다 정치권은 익숙한 말을 꺼낸다.

“청문회를 지켜봐야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국회 인사청문회는 장관 후보자의 자질과 도덕성, 정책 능력을 검증하는 공식 절차다.

그러나 이번에는 질문의 순서가 달라야 한다.

청문회까지 가야 할 사람을 왜 장관 후보자로 지명했는가.

김승원 법무부 장관 후보자와 용혜인 성평등가족부 장관 후보자를 둘러싼 논란이 단순한 ‘청문회 공방’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다.

김 후보자를 둘러싸고는 신약 관련 청탁 의혹과 과거 행적 등을 놓고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용 후보자 역시 비레대표 국회의원직 유지 문제와 배우자의 당직 문제, 장관직 수행에 필요한 전문성 등을 놓고 검증이 요구되고 있다.

물론 제기된 의혹이 곧 범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관계가 확인돼야 하고, 필요한 경우 수사기관의 판단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이 이번 인사의 핵심이다.

범죄 여부를 단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장관으로 임명하기 전에 의혹을 충분히 검증했느냐는 것이다.

특히 법무부 장관은 다르다.

법무부 장관은 법과 검찰, 수사와 인권을 책임지는 자리다. 사법 시스템의 공정성을 국민에게 설명하고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법 집행을 말해야 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런 자리를 둘러싸고 수사 필요성까지 거론되는 의혹이 불거졌다면, 대통령실의 인사검증은 당연히 더 엄격했어야 한다.

그런데 대통령실과 여당이 “청문회를 지켜보자”는 식으로 대응한다면 국민에게는 거꾸로 들릴 수 있다.

인사검증의 책임을 국회와 청문회에 넘기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다.

인사검증은 대통령의 몫이다.

청문회는 국회의 몫이다.

대통령이 후보자를 지명하고 국회가 검증하는 것은 헌법이 정한 절차지만, 그렇다고 대통령의 인사 책임까지 국회에 넘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청문회에서 문제가 드러나면 그때 판단하겠다는 것은 최소한의 절차일 뿐이다. 좋은 인사는 애초에 대통령실의 검증 단계에서 걸러져야 한다.

이번 논란이 개인의 자질 문제를 넘어 이재명 정부의 인사검증 시스템 문제로 번지는 것도 그래서다.

국민이 궁금한 것은 후보자들의 해명만이 아니다.

“대통령실은 무엇을 알고 있었는가.”

“알고도 지명했다면 왜 지명했는가.”

“몰랐다면 인사검증 시스템은 무엇을 검증한 것인가.”

이 세 가지 질문이다.

더구나 이재명 정부에는 피할 수 없는 정치적 맥락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대통령 자신의 사법리스크다.

이 대통령을 둘러싼 여러 형사사건과 재판은 취임 이후 헌법 84조의 대통령 불소추 특권을 둘러싼 해석과 맞물려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대통령 본인의 사법 문제와 장관 후보자의 논란을 직접 연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정치에서는 법적으로 별개의 문제가 국민의 인식 속에서 하나의 맥락으로 묶이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대통령이 사법적 논란의 한가운데 있는 상황에서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둘러싸고 다시 수사와 공정성 논란이 제기된다면 어떻겠는가.

정부가 아무리 “별개의 문제”라고 설명해도 국민은 그렇게만 보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이 권력의 숙명이다.

특히 이재명 정부가 출범하면서 강조했던 것이 공정과 개혁이었다면 더욱 그렇다.

자신에게 유리한 기준과 상대에게 적용하는 기준이 달라서는 안 된다.

권력은 상대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댈 때보다 자기 사람에게 같은 잣대를 적용할 때 신뢰를 얻는다.

이번 인사가 불편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사권자는 대통령이다.

따라서 장관 후보자에 대한 비판은 후보자 개인에게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을 선택한 대통령과 그 선택을 뒷받침한 인사 시스템까지 함께 들여다봐야 한다.

정권 초반의 인사는 특히 그렇다.

인사는 국정철학의 가장 구체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좋은 정책을 백 번 말하는 것보다 어떤 사람을 장관 자리에 앉히느냐가 국민에게는 훨씬 선명한 메시지가 된다.

그래서 이번 논란은 이재명 정부에 경고음이 될 수 있다.

지지율이 높다고 해서 국민적 신뢰가 자동으로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여론을 주도하고 정치적 프레임을 선점하는 것은 정권 운영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여론은 움직일 수 있어도 국민의 불신까지 움직일 수는 없다.

신뢰는 홍보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인사의 기준에서 만들어지고, 권력의 절제에서 만들어진다.

무엇보다 국민이 납득할 수 없는 인사가 반복될 때 신뢰는 서서히 무너진다. 지지율이 떨어지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국민이 정치에 기대하는 것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다.

정권의 레임덕도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대개는 작은 실망이 쌓이고, 해명이 반복되고, 책임지는 사람이 사라지면서 시작된다.

그래서 이번 인사를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김승원 후보자와 용혜인 후보자에 대한 최종 판단은 청문회와 필요한 검증 절차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그 전에 대통령실이 답해야 할 질문이 있다.

“왜 이 사람들을 장관 후보자로 선택했는가.”

청문회가 후보자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청문회가 대통령의 인사 책임을 대신해줄 수도 없다.

이번 인사는 두 장관 후보자의 문제가 아니라 이재명 정부가 어떤 기준으로 사람을 쓰고, 어떤 기준으로 권력을 행사할 것인가&#8203;를 보여주는 첫 번째 시험대가 될 수 있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완벽한 사람을 찾으라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국민에게 요구하는 도덕적 기준을 권력에도 똑같이 적용하라는 것이다.

그 원칙이 무너지면 정권은 야당의 공격 때문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다.

국민의 마음에서 먼저 멀어진다.

그리고 권력의 진짜 위기는 바로 그때 시작된다.]]></description>
<author>모닝뉴스 기자</author>
<pubDate>Wed, 09 Sep 2026 10:51:55 GMT</pubDate>
</item>
<item>
<title>변광용은 왜 삼성·한화 총수를 만나려 하나</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78875486387741016</link>
<description><![CDATA[변광용 거제시장이 삼성과 한화그룹 최고경영진에게 공식 면담을 요청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김동관 한화그룹 수석부회장이다.

거제에 양대 조선소를 둔 지방자치단체장이 그룹 총수를 공개적으로 만나겠다고 나선 것은 그 자체로 이례적이다. 면담 의제로 제시한 것도 설계인력의 부산 유출과 지역인재 채용, 정규직 일자리 확대, 기업과 지역의 상생 등이다.

문제는 이들 현안의 상당 부분이 그룹 총수가 직접 나서야만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라는 점이다. 설계인력 배치와 채용은 각 조선소의 경영전략과 인력계획에 따라 결정된다. 지역사회 공헌과 지방정부와의 협력 역시 계열사 경영진과 실무진의 협의를 통해 다룰 수 있다.

그런데도 변 시장은 실무협의가 아닌 ‘총수 면담’을 선택했다.

<b>왜 하필 총수인가.</b>

‘누구를 만날 것인가’보다 ‘무엇을 내놓을 것인가’

이번 행보의 핵심은 면담의 성사 여부만이 아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총수를 만나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다.

변 시장이 상대방으로 지목한 것은 삼성중공업이나 한화오션의 대표가 아니라 삼성과 한화라는 그룹의 최고 의사결정권자다. 개별 조선소의 경영 판단을 넘어 그룹 차원의 결단과 관심을 끌어내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 배경에는 조선업의 회복과 거제의 침체가 동시에 존재하는 역설이 있다.

양대 조선소의 수주가 늘고 조선업이 되살아나고 있지만 거제의 인구와 청년층은 줄고 있다. 변 시장이 밝힌 자료에 따르면 올해 거제시 인구는 2400여 명, 청년인구는 2600여 명 감소했다.

조선업이 살아나는데 조선도시 거제는 왜 살아나지 않는가.

변 시장이 총수들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은 결국 여기에 닿아 있다.

특히 부산지역 설계센터 확대는 이 문제를 상징한다. 생산 현장은 거제에 남아 있는데 설계와 연구, 고급 일자리가 외부로 빠져나간다면 조선업 회복의 과실이 지역에 얼마나 축적될 수 있느냐는 문제다.

따라서 총수 면담 요구는 단순한 민원 제기라기보다 기업의 성장과 지역의 성장 사이에 생긴 간극을 그룹 최고경영진에게 직접 묻는 정치적 행위로 볼 수 있다.

<b>거제는 기업에 수혜를 주는가, 받는가</b>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한다.

거제와 삼성·한화의 관계를 단순히 ‘기업이 지역에 무엇을 해줄 것인가’라는 구도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거제는 섬이다. 공간은 한정돼 있고 자체적인 산업·인구 자원도 풍부하지 않다. 조선산업에 대한 의존도 역시 높다.

삼성중공업과 한화오션은 거제의 노동력과 산업 기반, 항만과 도시 인프라를 활용해 성장해왔다. 거제 역시 두 기업이 만들어낸 일자리와 경제적 효과에 크게 기대왔다.

누가 누구에게 일방적으로 수혜를 주는 관계라고 말하기 어렵다.

거제가 기업에 수혜를 베풀고 있는가. 아니면 거제가 기업으로부터 수혜를 받고 있는가.

어쩌면 정확한 질문은 이것일 것이다.

서로 무엇을 주고받고 있으며, 앞으로 무엇을 더 주고받을 수 있는가.

총수와의 면담을 진정한 협상으로 만들려면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b>‘도와달라’고 할 것인가, ‘함께 가자’고 할 것인가</b>

거제시가 삼성과 한화의 최고경영진을 만나려 한다면 절박함만 호소해서는 부족하다.

거대 기업은 지방정부의 사정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기업에도 기업의 계산이 있다. 필요한 인재를 확보할 수 있는 도시인지, 핵심인력이 정착할 수 있는 도시인지, 새로운 사업과 투자를 담아낼 공간과 인프라가 있는지, 기업의 미래 전략과 맞물릴 수 있는지를 따진다.

따라서 총수를 움직이는 가장 강한 논리는 ‘거제가 어렵다’는 호소가 아니라 ‘거제와 함께 가는 것이 기업에도 이익이다’라는 제안이어야 한다.

기업이 탐낼 만한 거제의 미래를 보여줘야 한다.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를 키우고, 연구와 설계가 가능한 환경을 만들고, 주거·교육·교통·문화·의료 등 정주 여건을 개선해 핵심인력이 떠나지 않는 도시를 만드는 구상이다.

더 나아가 기업의 새로운 투자와 산업전략이 거제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도시의 공간과 기능을 다시 설계해야 한다.

거제를 기업에 내놓으라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 탐낼 만한 거제를 만들어 놓고 함께 투자하자고 해야 한다.

원석이 아무리 크다고 자랑해도 보석이 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누가 그 가치를 알아보느냐가 아니라, 그 원석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이다.

총수를 만나려는 지방정부라면 기업에 ‘가공을 맡길 원석’을 내놓아야 한다.

<b>기업상생기금에서 총수 면담까지</b>

변 시장의 이번 행보가 갑작스러운 것도 아니다.

그는 과거에도 양대 조선소를 상대로 기업상생기금 출연 등을 요구해왔다. 조선업 위기 당시 정부와 지방정부가 산업과 고용을 지키기 위해 역할을 했다면, 조선업이 회복된 뒤에는 기업 역시 지역사회와 성과를 나눠야 한다는 논리다.

이번에는 요구의 무대가 달라졌다.

기업상생기금이 기업의 지역사회 환원을 요구하는 것이었다면, 총수 면담은 일자리와 인력, 기업 기능의 지역 잔류라는 보다 구조적인 문제를 겨냥한다.

결국 메시지는 하나로 모인다.

조선소가 거제에서 성장한다면 그 성장의 일부가 거제의 일자리와 인구, 지역경제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 요구 자체는 충분히 타당한 문제 제기다.

그러나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또 다른 질문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기업이 거제에 더 머물러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지방정부가 이 질문에 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가 중요하다.

왜 공개적으로 총수를 부르는가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면담 요청을 조용히 진행하지 않고 언론에 공개했다는 점이다.

과거에도 양대 조선소와의 협의를 통해 지역 현안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있었다. 그러나 그룹 총수와의 공식 면담이 실제로 성사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기업 입장에서는 상당수 현안을 계열사 경영진과 실무진 차원에서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번 공개 요청은 면담 자체만을 위한 행동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총수 면담 요구에는 두 가지 효과가 동시에 작동한다.

하나는 기업을 향한 압박이다.

다른 하나는 시민을 향한 메시지다.

“시장이 할 수 있는 데까지 직접 나서고 있다.”

지역 현안을 최고 의사결정권자에게 직접 전달하겠다는 정치적 신호이기도 하다.

특히 설계인력의 부산 확대를 둘러싼 지역사회의 반발이 커진 상황에서 이 의제는 정치적으로도 선명하다. 조선업 호황이라는 긍정적 지표 뒤에 가려진 인구 유출과 일자리의 질, 지역경제의 침체를 다시 전면에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b>‘까치발’의 경제학</b>

여기서 ‘까치발’이라는 비유가 등장한다.

키가 작은 아이가 까치발을 들면 실제 키가 커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상대와 눈높이를 맞출 수는 있다.

지방정부와 거대 기업 사이에도 비슷한 구조가 있다.

기업의 인사와 투자, 조직 배치에 대해 지방정부가 행사할 수 있는 직접적인 권한은 제한적이다. 특히 글로벌 경쟁을 벌이는 대기업에게 지역의 요구만으로 경영 판단을 바꾸라고 요구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지방정부가 가진 힘은 무엇인가.

여론, 정치적 명분, 지역사회와의 관계, 그리고 도시가 가진 미래의 가치다.

총수를 직접 만나겠다는 공개적인 행위는 제한된 제도적 권한을 정치적 영향력과 상징적 권위로 보완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외교는 시작될 수 있다.

힘이 없는 사람이 힘 있는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 굴욕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협상력을 냉정하게 인정하고 상대의 힘을 움직여야 할 때 움직이는 것이 외교다.

문제는 까치발을 든 다음이다.

까치발은 눈높이를 맞추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오래 서 있을 수는 없다.

<b>정치적 퍼포먼스와 외교력의 경계</b>

그래서 총수 면담 요구를 정치적 퍼포먼스라고 단정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총수와의 만남 자체를 외교적 성과로 포장해서도 안 된다.

경계는 의외로 간단하다.

시민의 이익을 최우선에 두고, 거제의 절박한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한 뒤, 기업과 거제가 함께 얻을 수 있는 것을 제시하느냐다.

그것이 있다면 총수 면담은 외교다.

반대로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거나 ‘큰 사람과 만나는 시장’이라는 이미지를 만드는 데 목적이 있다면 정치적 퍼포먼스에 가까워진다.

총수의 어깨에 올라가 자신을 크게 보이려는 것과, 자신의 도시를 크게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b>만나면 성과, 만나지 않아도 명분</b>

이번 행보에는 정치적으로 묘한 역설도 있다.

총수가 만나주면 변 시장에게 정치적 성과가 된다. 만나주지 않아도 명분이 남는다.

면담이 성사되면 시장은 거제의 현안을 그룹 최고경영진에게 직접 전달했다는 성과를 내세울 수 있다.

반대로 면담이 성사되지 않으면 지역의 절박한 요구에 기업이 응답하지 않았다는 구도가 만들어질 수 있다.

따라서 면담 요청 자체가 정치적 메시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냉정하게 볼 필요가 있다.

<b>만남은 성과가 아니다. 결과가 성과다.</b>

총수가 거제를 방문하고 시장과 악수한다고 해서 설계인력이 돌아오는 것도, 청년이 거제로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신규 정규직 채용은 기업의 사업 전망과 인력수급 계획에 따라 결정되고, 설계·연구 기능의 지역 잔류 역시 기업의 전략적 판단이다.

총수 면담 이후를 준비하고 있는가

결국 진짜 승부는 면담 이후다.

거제시는 기업에 무엇을 요구할지와 함께 무엇을 제공할 것인지 준비해야 한다.

양대 조선소와 정기적인 협의체를 만들고, 설계·연구인력의 지역 잔류를 위한 정주환경을 개선해야 한다. 지역인재를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로 키울 교육·훈련 체계를 만들고, 기업의 투자와 도시계획을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거제의 비전이다.

조선소가 있어야만 존재하는 도시가 아니라, 조선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와 기술, 생활환경을 갖춘 도시. 조선산업의 변화가 오더라도 새로운 산업과 일자리를 담아낼 수 있는 도시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 비전이 있어야 기업과의 관계도 ‘도와달라’에서 ‘함께하자’로 바뀔 수 있다.

<b>조선 호황인데 거제는 왜 어려운가</b>

결국 이번 변 시장의 행보가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총수 면담의 성사 여부가 아니다.

조선업은 살아나는데 왜 조선도시 거제의 청년은 떠나는가.

이 질문에는 기업만 답할 수도 없고 지방정부만 답할 수도 없다.

기업은 지역에서 얻은 성장의 과실을 지역과 어떻게 나눌 것인지 답해야 한다. 지방정부 역시 기업에 무엇을 요구할 것인지에 앞서 기업이 계속 투자하고 머물고 싶은 도시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 답해야 한다.

변 시장이 총수를 만나고 싶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거제의 약함을 인정하는 것. 지금의 절박함을 직시하는 것. 그리고 그 절박함을 호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삼성과 한화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거제의 미래를 제시하는 것.

그것이 갖춰졌다면 총수 면담은 충분히 외교적 시도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거대한 기업의 어깨에 올라타려는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까치발을 든다고 키가 커지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높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높아지는 것이다.

변광용 시장의 ‘총수 면담’ 카드가 정치적 퍼포먼스에 그칠지, 아니면 거제와 삼성·한화의 관계를 새롭게 설계하는 협상의 출발점이 될지는 결국 면담 이후 무엇을 만들어내느냐에 달려 있다.

까치발을 들지 말고, 작은 거인이 되어야 한다.]]></description>
<author>모닝뉴스 기자</author>
<pubDate>Mon, 07 Sep 2026 13:21:03 GMT</pubDate>
</item>
<item>
<title>[오늘의 칼럼] 끝내 무엇을 소유했는가</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78814274387721016</link>
<description><![CDATA[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인류의 문명도 물을 따라 흘렀다. 나일강과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인더스강과 황허강. 사람들은 강가에 모여 농사를 짓고 마을을 이루었으며 도시와 국가를 만들었다.
물은 생명을 낳았고 문명을 일으켰다.

그런데 물은 생명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욕망의 시작 이기도 했다.
처음 인간에게 필요한 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두 손으로 떠 마실 수 있고, 표주박 하나에 담을 수 있으면 됐다. 깨끗한 물 한 모금이면 목마름이 가셨고, 그것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어느 순간 표주박보다 큰 그릇을 원하기 시작했다.
그릇이 커지자 더 많은 물이 필요했고, 더 많은 물을 가지려 하자 물이 흐르는 길을 막기 시작했다. 수로를 만들고 둑을 쌓고 마침내 거대한 댐을 세웠다.

처음에는 모두를 위한 것이었다.
가뭄에 대비하기 위해서였고, 물을 필요한 곳에 나누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소유의 욕망이 끼어드는 순간 물은 흐르는 생명이 아니라 가두어야 할 자산 이 된다.

물을 가진 자가 힘을 갖게 되고, 물길을 통제하는 자가 사람의 삶까지 통제하게 된다.
문명은 그렇게 질서를 만들었지만, 동시에 소유의 경계도 만들었다.

욕망의 시작은 작은 점 하나처럼 보인다.
조금 더 가지려는 마음,
조금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마음,
조금 더 인정받으려는 마음이다.
점 하나가 선이 되고, 선이 면이 되고, 마침내 다른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블랙홀처럼 커진다.

한 사람이 담을 수 있는 만족할 만 한 그릇의 크기는 어느정도일까.
그릇의 크기는 소유의 양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비워낼 수 있는 깊이로 결정되는 것은 아닐까.
 
욕망에는 마지막이 없다.
하나를 가지면 둘을 원하고, 둘을 가지면 열을 원한다.
마침내 사람이 물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물이 사람을 소유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울타리를 만든다.
내 땅과 네 땅을 나누고,
내 물과 네 물을 나누고,
우리와 그들을 나눈다.

국가도 울타리를 만들고, 종교도 울타리를 만들며, 권력도 울타리를 만든다.
질서를 위한 경계는 필요하다.

문제는 경계가 사람을 보호하는 것을 넘어 사람을 배제하기 시작할 때다.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선택받았다고 생각하고, 밖에 있는 사람을 부족한 존재로 바라본다.
그때 선민의식이 생긴다.

부가 계급이 되고, 계급은 권력이 되며, 권력은 자신을 보호할 또 다른 질서를 만든다.
그렇게 사회는 어느 순간 거대한 설국열차처럼 변한다.
같은 열차를 타고 있지만 객차는 다르고, 같은 물을 필요로 하지만 물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삶은 전혀 달라진다.

더 무서운 것은 욕망이 사람의 눈을 가린다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사람이 물을 바라본다.
그러나 욕망이 커지면 물밖에 보이지 않는다.
더 많이 가진 것만 보이고, 더 높은 자리가 보이고, 더 강한 권력이 보인다.
자신이 무엇을 위해 그것을 가지려 했는지는 잊어버린다.

욕망이 또아리를 트는 순간 신은 영안(靈眼)을 거두어가고 그 자리는 욕망의 눈이 또아리를 튼다.

사람은 자신이 갇힌 울타리를 보고 세상이라고 믿는다.
울타리 밖에 무엇이 있는지 보지 못한다.
자신이 가둔 것은 물이었지만, 결국 가두어진 것은 자신이었다.


성경은 인간에게 이 땅을 맡겼다고 말한다.
그러나 '소유'와 '맡김'은 다르다.
맡겨진 것은 영원히 내 것이 아니다.
내가 사용하는 동안에도 다음 세대의 몫이 남아 있고, 내가 누리는 동안에도 다른 사람의 몫이 있다.

성경의 희년 사상 역시 결국 이 지점으로 돌아온다.
땅은 영원히 사고팔아 한 사람의 소유로 굳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다시 돌아가야 할 것이었다.

우리는 소유자가 아니라 관리자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이것은 종교의 언어를 넘어 오늘의 사회에도 던지는 질문이다.
국가는 누구의 것인가.
자연은 누구의 것인가.
권력은 누구의 것인가.
종교는 누구의 것인가.
그리고 우리가 가진 재산은 과연 온전히 우리의 것인가.

물이 흐르지 않고 한곳에 고이면 썩는다.
권력도 그렇다.
부도 그렇다.
지식도 그렇다.
심지어 신앙도 그렇다.
흐르지 않는 것은 생명을 잃는다.
그래서 강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높은 곳에 머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까지 도달하기 위해 흐른다.
인간이 만든 댐은 물을 잠시 가둘 수 있지만, 자연의 흐름까지 영원히 소유할 수는 없다.
역사도 마찬가지다.

어떤 권력도 영원하지 않았고, 어떤 부도 영원하지 않았으며, 어떤 국가도 영원하지 않았다.
우리가 영원히 소유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들은 결국 우리 손을 떠났다.

어쩌면 인간의 가장 큰 착각은 자신이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인지 모른다.
신은 누구에게나 공평했다.

어린아이든 노인이든,
주인이든 나그네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누구나 목이 마르면 물을 찾는다.

지위와 상관없이 왕도 목이 마르고 거지도 목이 마른다.
권력자도 물이 필요하고 이름 없는 사람도 물이 필요하다.
생명 앞에서는 모두가 같다.

그런데 인간은 그 물에 다시 이름표를 붙인다.
누구의 물인지,
누가 관리하는지,
누가 더 많이 가져야 하는지,
누가 접근할 수 있는지를 정한다.
질서를 위해 만든 규칙이 어느 순간 소유를 위한 장벽이 된다.

두 손이면 충분했던 물.
표주박 하나면 충분했던 물.
목을 축이고 생명을 이어주면 그만이었던 물.
인간은 왜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을까.

어쩌면 욕망의 문제는 그릇의 크기가 아니라 족함을 모르는 마음 에 있는지 모른다.
세상에는 아무리 큰 그릇을 가져도 목마른 사람이 있고, 작은 그릇 하나로도 평생 감사하는 사람이 있다.

진짜 가난은 가진 것이 적은 데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가진 것이 아무리 많아도 더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반대로 진짜 풍요는 많이 소유하는 데 있지 않다.
내게 필요한 만큼 누리고, 나머지는 흘려보낼 수 있는 데 있다.

강물을 모두 가두어 놓으면 강은 더 이상 강이 아니다.
생명을 품고 흘러야 할 물이 소유의 대상이 되는 순간 그 물은 사람을 살리는 것에서 사람을 지배하는 것으로 바뀐다.

국가도, 권력도, 종교도 마찬가지다.
자신만의 울타리를 높이고 그 안에 권위와 부와 정보를 쌓아두는 순간, 그것은 공동체를 위한 질서가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성벽이 된다.

그리고 성벽이 높아질수록 안에 있는 사람은 안전하다고 믿지만, 역설적으로 세상과의 연결은 끊어진다. 결국 가둔 것은 세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신은 인간에게 이 땅을 허락했을 뿐, 영원한 소유권을 넘긴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잠시 맡아 쓰는 사람들이다.
오늘의 물도,
오늘의 땅도,
오늘의 권력도,
오늘의 부도,
오늘의 생명도 그렇다.

그러니 물을 가둔 자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물을 소유한 것인가, 아니면 물을 잠시 맡은 것인가.
그리고 더 큰 그릇을 가진 사람에게 묻고 싶다.
그 그릇은 얼마나 큰가가 아니라, 언제 비울 수 있는가.

욕망은 세상을 소유하려 하지만 지혜는 흘려보낼 줄 안다.
물은 높은 곳에 머물지 않고 낮은 곳으로 흐른다.
사람도 그래야 한다.
흐르는 물처럼 살고, 맡겨진 것을 지키며, 내 것이 아닌 것에는 욕심을 내지 않는 것.
어쩌면 그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오래된 사용설명서인지 모른다.]]></description>
<author>모닝뉴스 기자</author>
<pubDate>Mon, 31 Aug 2026 11:19:03 GMT</pubDate>
</item>
<item>
<title>[칼럼] 연극이 끝난 무대를 본 적이 있나요</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78781351487718016</link>
<description><![CDATA[연극이 끝난 무대를 본 적이 있는가.
관객이 모두 돌아가고 배우도 무대복을 벗은 뒤, 조명마저 꺼진 무대. 조금 전까지 웃음과 박수가 가득했던 곳에 고요만 남는다. 샤프의 노래 ‘연극이 끝나고 난 뒤’를 들으면 나는 인생을 생각한다.

우리도 모두 하나의 무대에 올라와 있기 때문이다.
태어나는 순간 막이 오르고, 우리는 각자의 배역을 맡는다. 누군가는 부모가 되고, 누군가는 자식이 되고, 누군가는 친구가 된다. 때로는 주인공이고 때로는 조연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내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나는 주인공이다.
주인공이라고 해서 반드시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많은 박수를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내게 주어진 삶을 살아내고 그 안에서 나의 가치를 발견하는 사람이 주인공이다.

하루도 하나의 막이다.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면 새로운 막이 열린다. 어제의 무대는 끝났지만 오늘이라는 무대가 다시 주어진다.

그래서 아침이 감사하다.
눈을 뜨고 숨을 쉬며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이유가 있다.

우리는 너무 자주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걱정하느라 오늘을 놓친다. 그러나 인생은 리허설이 아니다. 오늘의 하루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아침안개가 햇살 앞에서 사라지고, 풀잎의 이슬이 어느 순간 흔적 없이 사라지듯 우리도 언젠가는 무대에서 내려온다.

영원할 것 같지만 영원하지 않은 삶이다.
그렇기에 오늘이 소중하다.

지나간 일 가운데는 실패도 있고 후회도 있고 아픔도 있다. 하지만 지나간 장면은 다시 바꿀 수 없다. 다만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은 바꿀 수 있다.
어제의 슬픔이 오늘의 지혜가 되기도 하고, 실패가 겸손이 되기도 한다.

지나간 것은 감사와 추억으로 보내고, 다가올 것은 기대와 기도로 맞이하는 것. 그 사이에 오늘이 있다.

자연도 그렇다.
우리가 걷는 땅은 오래전 우리의 조상들이 살았던 곳이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곳이며, 앞으로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갈 곳이다.

자연은 인간에게 영원을 약속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살아온 시간을 말없이 기록한다.
나무의 나이테에도 시간이 있고, 바위에도 시간이 있고, 우리가 걸었던 길에도 시간이 있다.

언젠가 내가 유에서 무로 돌아가고 나를 기억하는 사람마저 사라지는 날이 오더라도 한때 우리가 이곳에 살았다는 시간까지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사라져도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자연은 그 시간을 기록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그러니 우리가 남겨야 할 것도 생각해보게 된다.

세상에서 최고가 되는 것만이 삶의 목적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에게 따뜻한 사람이 되는 것, 가족을 사랑하는 것, 내가 살아온 땅을 다음 사람에게 온전히 돌려주는 것. 그런 것도 충분히 아름다운 삶이다.

그렇다고 나 자신을 잊어서도 안 된다.
남을 위해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를 지키는 것 역시 삶의 책임이다. 힘들면 쉬고, 아프면 도움을 청하고, 때로는 싫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내 삶의 주인공이 나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오히려 오래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된다.
연극은 언젠가 끝난다.

박수도 멈추고 조명도 꺼진다.
마지막에 중요한 것은 얼마나 큰 박수를 받았느냐가 아닐 것이다.
내게 주어진 무대에서 어떤 사람으로 살았느냐일 것이다.

사랑했는가.
감사했는가.
내가 가진 것을 나누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삶을 나답게 살아냈는가.

오늘도 막이 올랐다.
아직 조명이 켜져 있고, 아직 내게는 할 일이 남아 있다.
그러니 오늘이라는 한 막을 살아보자.

최고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삶의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
지나간 것은 감사로 보내고, 다가올 것은 기대하며 기다리고, 오늘은 온전히 살아내자.
하루가 쌓이고 이틀이 쌓여 우리의 삶이 된다.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 막이 내린 뒤 돌아보았을 때, 화려한 성공보다 따뜻한 장면들이 오래 남아 있다면 좋겠다.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보다, 내가 살아온 시간이 무엇으로 기록되었는가가 더 중요하니까.
오늘도 다시 무대에 오르자.

오늘이라는 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description>
<author>모닝뉴스 기자</author>
<pubDate>Thu, 27 Aug 2026 15:51:54 GMT</pubDate>
</item>
<item>
<title>[칼럼] 물은 빠졌는데, 시장은 아직 멈춰 있다</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78762628587712016</link>
<description><![CDATA[수해 피해를 계산할 때 우리는 보통 침수된 집과 가게, 망가진 도로와 하천, 물에 잠긴 자동차를 센다. 피해액은 그렇게 산정된다.

그러나 재난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가게 문을 닫은 날의 매출은 어디에 기록되는가.손님이 발길을 돌린 식당의 매출 감소는 누가 계산하는가.
수해 소식에 외출을 줄이고 지갑을 닫은 시민들의 소비 위축은 피해액에 들어가는가.
아니다.
물에 잠긴 것은 집과 가게만이 아니다. 지역경제의 순환도 함께 잠긴다.

이번 거제 수해가 그렇다.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됐고, 도로와 전기, 상하수도 등 공공시설 복구가 시작됐다. 침수 주택과 상가 등 직접 피해에 대한 지원도 뒤따를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거제의 일상이 돌아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수해를 입은 상인은 물건을 버리고 가게를 다시 정리해야 한다. 피해를 입지 않은 상인도 손님이 줄어든다. 시민들은 외출을 줄이고 소비를 미룬다. 식당과 시장, 소매점, 자영업자의 매출이 함께 떨어진다.

피해는 침수된 곳에서 끝나지 않고 상권 전체로 번진다.
그래서 재난 이후에는 두 종류의 복구가 필요하다.

하나는 시설의 복구다.다른 하나는 경제의 복구다.

첫 번째는 정부와 지자체가 비교적 명확하게 할 수 있다. 무너진 도로를 고치고, 끊어진 수도를 연결하고, 피해를 조사해 지원금을 지급하면 된다.

두 번째는 조금 다르다.
사람들이 다시 돈을 쓰게 만들어야 한다.
국민의힘 거제시의원들이 25일 기자회견에서 가용재원을 총동원한 긴급추경과 피해 사각지대 지원을 요구했다. 눈여겨볼 대목이다.

특히 지난해 민생회복지원금 지급 당시 국민의힘이 통합재정안정화기금의 현금성 지원에 신중해야 한다고 했던 점을 스스로 꺼내 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다르다고 했다.

재정 여력을 남겨두자고 했던 이유가 바로 이런 재난과 긴급한 재정수요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보면 꽤 불편한 자기고백이다.
그러나 재난 앞에서는 이런 불편함이 오히려 정직하다.
평상시의 민생지원금과 재난 이후의 민생회복지원금은 같은 이름이라도 목적이 다르다.

평상시에는 현금을 나눠주는 것이 재정적으로 타당한지를 따져야 한다. 하지만 지역경제의 순환이 재난으로 끊겼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민생회복지원금은 보상금이 아니다. 시장을 다시 돌리는 마중물이다.
거제시민 모두에게 지급할 것인지, 피해지역과 소상공인을 중심으로 설계할 것인지, 지역화폐로 할 것인지 등은 따져볼 문제다. 재정 여건도 따져야 한다.

그러나 적어도 논의는 시작해야 한다.
상인들이 요구하는 저리 긴급대출과 이자 지원도 마찬가지다.
돈을 빌려주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이미 매출이 끊긴 상인에게 빚을 하나 더 얹는 것이 금융처방의 전부가 될 수도 없다.

그래서 금융과 소비를 함께 봐야 한다.
저리 대출로 버틸 시간을 주고, 민생회복지원으로 손님이 다시 시장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
하나는 버티게 하는 돈이고, 다른 하나는 돌게 하는 돈이다.

재난 직후 행정이 해야 할 일은 피해액을 집계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시민의 지갑이 다시 열리고, 상인의 계산대가 다시 울리고, 시장 안에서 돈이 한 바퀴 돌게 만드는 것까지가 회복이다.

특별재난지역 선포가 무너진 시설을 복구하는 국가의 처방이라면, 민생회복지원은 멈춰버린 지역경제에 숨을 불어넣는 지방정부의 처방이 될 수 있다.

물은 빠졌다.
이제 돈이 돌아야 한다.
그래야 거제의 일상이 돌아온다.]]></description>
<author>모닝뉴스 기자</author>
<pubDate>Tue, 25 Aug 2026 11:51:25 GMT</pubDate>
</item>
<item>
<title>[칼럼] 민생지원금은 이런 때 쓰는 것이다</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78753631387703016</link>
<description><![CDATA[수해가 나면 먼저 도로부터 복구한다.

끊어진 도로를 잇고, 무너진 옹벽을 세우고, 전기를 복구하고, 수도를 다시 흐르게 한다.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되면 국가가 복구비를 지원하고 피해 주민에게 세금과 공공요금 감면 등 각종 지원도 뒤따른다.

그것으로 끝일까. 끝나지 않는다.

이번 거제 수해에서 물은 빠졌지만 상인들의 가게에는 아직 물에 젖은 상품과 집기가 남아 있다. 문을 열지 못하는 가게가 있고, 문을 열었어도 손님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수해를 직접 당하지 않은 시민들도 마찬가지다.

도로가 끊기고, 상권이 멈추고, 사람들의 외출이 줄어든다. 재난지역에서 소비가 위축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해외 사례에서도 재난 직후 음식점과 의류점 등의 재량적 소비가 감소한 사례가 확인됐다.

그러니 수해 피해를 피해액이라는 숫자만으로 계산해서는 안 된다.

무너진 집의 가격만 계산해서는 지역경제가 얼마나 위축됐는지 알 수 없다.

가게가 며칠 문을 닫았는지, 손님이 얼마나 줄었는지, 시민들이 얼마나 소비를 줄였는지, 그 여파로 종업원의 소득과 주변 상권의 매출이 얼마나 감소했는지도 봐야 한다.

그래서 민생지원금은 이런 때 필요하다.

평상시라면 반대할 수 있다. 하지만 재난으로 지역경제의 순환 자체가 막힌 상황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돈을 주는 것만이 아니라 돈이 지역 안에서 다시 돌게 하는 것이 목적이어야 한다.

지난해 민생회복 소비쿠폰 사례는 참고할 만하다. 한국은행 분석에서는 소비쿠폰 사용처의 매출이 비사용처보다 월평균 2.91% 더 증가했다. 특히 비수도권에서 효과가 상대적으로 컸다.

거제에 적용한다면 방법은 어렵지 않다.

지역 내에서 사용할 수 있는 소비쿠폰이나 지역화폐 형태로 지급하고, 음식점·전통시장·소매점·생활서비스업 등으로 사용처를 제한하면 된다.

피해 주민에게만 지급할 것인지, 거제시민 전체를 대상으로 할 것인지도 따져봐야 한다.

수해는 피해를 입은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상가가 문을 닫으면 주변 사람들의 일자리와 소득에도 영향을 미친다. 도로가 막히면 출퇴근과 영업이 불편해진다. 소비가 줄면 피해지역 전체의 매출이 떨어진다.

따라서 피해 규모와 재정 여건을 따져 한시적·지역 한정형 민생지원금을 검토할 이유가 있다.

여기에 금융지원도 필요하다.

상인들이 원하는 것은 당장 갚아야 하는 대출이 아니라 다시 장사를 시작할 때까지 버틸 수 있는 시간이다.

저리 긴급대출, 대출 보증, 이자 지원, 기존 대출 상환 유예 등을 묶은 금융 프로그램이 필요한 이유다.

정부와 경남도, 거제시가 각각 할 수 있는 일을 나눠야 한다.

국가는 재난복구비와 긴급 금융지원을 맡고, 경남도는 보증과 이자 지원을 확대하고, 거제시는 지역화폐나 소비쿠폰을 활용한 지역경제 회복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

특별재난지역 선포가 무너진 시설을 복구하는 돈이라면 민생지원금은 멈춰버린 지역경제를 다시 돌리는 돈이다.

수해로 막힌 것은 도로와 하천만이 아니다. 사람들의 소비심리도 함께 막혔다.

복구된 도로에 차량이 다시 다니고 전기가 들어왔다고 해서 경제가 바로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가게에 손님이 다시 들어오고, 상인이 다시 물건을 사고, 시민이 다시 지갑을 열어야 일상이 돌아온다.

민생지원금은 그때 필요한 마중물이다.

거제가 이번 수해를 계기로 무엇을 지원받을 것인가만이 아니라, 어떻게 지역경제를 다시 움직일 것인가를 논의해야 할 시점이다.
]]></description>
<author>모닝뉴스 기자</author>
<pubDate>Mon, 24 Aug 2026 10:51:53 GMT</pubDate>
</item>
<item>
<title>[생각의 창]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78641308987678016</link>
<description><![CDATA[“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네 바퀴로 가는 자전거”
김광석의 목소리로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는 그저 재미있는 노랫말인 줄 알았다.
자동차가 두 바퀴라니.자전거가 네 바퀴라니.

물속으로 비행기가 날고 하늘로 돛단배가 떠다닌다.
말이 안 된다.
그런데 이상하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웃음이 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다.
아마 이 노래가 오래 살아남은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이 노래의 시작은 김광석이 아니다.
1970년대 포크가수 양병집이 밥 딜런의 노래에 우리말 가사를 붙여 만든 번안곡 「역(逆)」이 출발점이다. 1973년 전국포크송콘테스트에서 처음 선보였고, 이후 이연실이 불렀으며 김광석이 다시 부르면서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양병집이 노래를 만들던 시대는 유신체제 아래였다.
세상은 자유롭지 않았고, 말 한마디에도 조심해야 했다.
그런 시대에 양병집은 정면으로 세상을 꾸짖기보다 세상을 거꾸로 세워놓았다.

자동차의 바퀴를 바꾸고, 자전거의 바퀴를 바꾸고, 하늘과 땅을 뒤집고, 남자와 여자의 모습을 뒤집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상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웃기는 것 같지만 웃을 수만은 없는 세상.
그래서 제목도 ‘역(逆)’이었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 노래는 당시 '삐딱한 가사' 때문에 판매금지를 당했고, 경향신문이 2002년 양병집을 소개한 기사에는 발매 당시 약 800장만 팔렸다고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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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세월이 흘렀다.
시대가 달라졌다.
그리고 이 노래는 김광석의 목소리를 타고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김광석은 이 노래를 화내듯 부르지 않는다.
세상을 향해 삿대질하지도 않는다.
그저 담담하게 노래한다.
그래서 더 오래 남는다.

정말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가 이상한 것일까.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정해진 모양에 익숙해져 있었다.
자동차는 네 바퀴여야 한다.자전거는 두 바퀴여야 한다.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아이들은 이렇게 공부해야 한다.좋은 직장은 이런 곳이어야 한다.성공한 사람은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
그 기준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우리는 말한다.
“이상하다.”
그런데 누가 정한 것일까.

자동차가 네 바퀴여야 한다는 것은 기술적인 이유가 있다.
하지만 사람의 삶까지 네 바퀴여야 할 이유가 있을까.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달려야 할까.
모두가 같은 속도로 살아야 할까.

누군가는 빨리 가고, 누군가는 천천히 간다.
누군가는 앞을 향해 달리고, 누군가는 잠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본다.
누군가는 높은 곳을 바라보고, 누군가는 낮은 곳에서 작은 꽃 하나를 바라본다.
그것이 틀린 삶일까.

얼마 전 우리는 그림 이야기를 했다.
그림을 잘 그린다는 기준이 있다.
사람을 사람처럼 그리고, 나무를 나무처럼 그리고, 하늘을 하늘처럼 그리는 것.
하지만 그림을 잘 그리는 것과 좋은 그림을 그리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실물과 똑같이 그리는 것이 목적이라면 사진을 찍으면 된다.

그림에는 그림을 그린 사람만이 담을 수 있는 것이 있다.
마음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잘 사는 것과 남들이 말하는 대로 사는 것은 다르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기준을 알려준다.
공부를 잘해야 한다.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좋은 직장을 가져야 한다.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

물론 배워야 할 것은 배워야 한다.
더하기와 빼기를 모르면 계산할 수 없고, 과학의 원리를 모르면 세상을 이해하기 어렵다.

기술과 지식에는 분명한 기준이 있다.
하지만 인생에는 하나의 정답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지식의 기준을 삶의 기준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아이에게도 같은 그림을 그리게 한다.
남들과 같은 색을 고르게 하고, 남들과 같은 길을 걷게 한다.

그러다 아이가 다른 그림을 그리면 묻는다.
“왜 너는 남들과 다르니?”
어쩌면 질문을 바꿔야 하는지도 모른다.
“너는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니?”

세상은 생각보다 넓다.
자동차가 네 바퀴로 가는 세상에서도 두 바퀴로 갈 수 있는 길은 있을 수 있다.
남들이 오른쪽으로 간다고 해서 왼쪽으로 가는 사람이 틀린 것은 아니다.

때로는 돌아가는 길이 가장 먼 길이 아니라 가장 자기다운 길일 수도 있다.
우리가 정말 경계해야 할 것은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가 아니다.
모두에게 네 바퀴를 달아주려는 세상이다.

모두에게 같은 꿈을 주고, 같은 성공을 가르치고, 같은 행복을 요구하는 세상.
그런 세상에서는 다른 사람이 되는 순간부터 자신의 삶을 설명해야 한다.
왜 그렇게 사느냐고.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왜 남들과 다르냐고.

그러나 사람은 자동차가 아니다.
정해진 부품을 끼워 넣으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다.
사람에게는 마음이 있고, 기억이 있고, 상처가 있고, 꿈이 있다.

그래서 사람마다 삶의 바퀴도 다를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른 사람의 바퀴가 몇 개인지 세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바라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광석의 노래가 오래된 지금도 여전히 마음에 남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세상을 정해진 기준으로 바라본다.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생각하고, 익숙하지 않은 것을 이상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가끔은 세상을 뒤집어 볼 필요가 있다.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를 상상해 보고, 네 바퀴로 가는 자전거를 상상해 보는 것처럼.
그렇게 세상을 한 번 뒤집어 보면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 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 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어쩌면내가 옳다고 믿었던 세상의 기준도 한 번쯤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 노래는 끝났는데질문은 남는다.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가 정말 이상한 것일까.
아니면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네 바퀴로 가는 세상만 보아온 것은 아닐까.]]></description>
<author>모닝뉴스 기자</author>
<pubDate>Tue, 11 Aug 2026 10:51:29 GMT</pubDate>
</item>
<item>
<title>[생각의 창] 나다운 그림</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78635409287674016</link>
<description><![CDATA[그림을 그릴 때 우리는 쉽게 말한다.
“잘 그렸다.”“못 그렸다.”

그런데 누가 정한 기준일까.

선을 곧게 그어야 하고,사람은 사람답게 그려야 하고,하늘은 하늘색이어야 하고,꽃은 꽃처럼 보여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그림을 가르치면서 그림을 그리는 법보다 그림을 평가받는 법부터 가르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림을 제대로 그리기 위해서는 배워야 할 것이 있다.
선을 긋는 법을 알아야 하고,색을 섞는 법도 알아야 하며,빛과 그림자를 이해해야 한다.

사실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싶다면 원근법도 배워야 한다.
그것은 자유를 제한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기술을 알게 되면 더 자유롭게 그릴 수 있다.

하지만 기술을 배웠다고 해서 모든 그림이 같은 모양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진처럼 똑같이 그리는 것이 목적이라면 굳이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다.
사진을 찍으면 된다.

그림에는 사진이 담지 못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마음,그날의 기분,기억,상상,그리고 말로 표현하지 못한 무언가.
그래서 중요한 질문은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는가?” 가 아니라 “나는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은가?” 일지도 모른다.

어디에 그릴 것인가.무엇을 담을 것인가.어떤 색을 사용할 것인가.그리고 그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무엇을 남길 것인가.
배워야 할 것은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상상해야 할 것까지 대신 상상해주어서는 안 된다.

과학에는 법칙이 있다.수학에는 답을 찾는 방법이 있다.
더하기와 빼기를 모르면 계산할 수 없고,과학의 기본 원리를 모르면 자연의 현상을 이해하기 어렵다.
배워야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인생에는 수학 공식처럼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를 키우는 일도 그렇다.
부모가 해야 할 책임을 큰아이에게 떠넘겨서는 안 된다.
“네가 형이니까.”“네가 누나니까.”“동생을 잘 봐야지.”
형과 누나는 부모가 아니다.
동생을 사랑하고 돌볼 수는 있지만,부모의 책임까지 대신 질 수는 없다.

아이에게 책임을 가르치는 것과 어른의 책임을 아이에게 떠넘기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교육은 아이를 부모가 원하는 모습으로 만드는 일이 아니라, 아이가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필요한 것을 가르치는 일이어야 한다.
그래서 잘못을 지적할 때도 사람을 부수어서는 안 된다.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림을 찢어버릴 필요는 없다.
다시 그릴 수도 있고, 다른 색을 칠할 수도 있으며, 때로는 처음 그린 선을 그대로 두고 그 위에 새로운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잘못한 일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잘못된 사람인 것은 아니다.
우리가 다시 배워야 하는 것은 사람을 고치는 기술이 아니라 사람을 바라보는 마음인지도 모른다.

용서도 그렇다.
“나는 너를 용서했다.”
그 한마디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잘못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고 용서를 구할 줄 알아야 한다.
용서하는 사람 역시 상대의 잘못 때문에 자신의 마음까지 망가뜨리지 않아야 한다.
용서는 잘못을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그 잘못이 나의 남은 삶까지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용서는 상대를 위한 일이면서 결국 나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림도,교육도,양육도,인생도 결국 비슷하다.
가르쳐야 할 것은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정답까지 대신 그려주어서는 안 된다.
색을 알려줄 수는 있지만 어떤 색을 좋아할지는 대신 정할 수 없다.

그림의 기술을 가르칠 수는 있지만 어떤 세상을 그릴지는 아이의 몫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의 그림을 보고 “잘 그렸다.” “못 그렸다.” 라고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차라리 이렇게 물어보면 어떨까.
“무엇을 그리고 싶었니?”
그 질문 하나가 아이의 마음을 열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교육은 잘 그리는 사람을 만드는 교육이 아니라, 자신의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을 만드는 교육인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똑같은 그림이 너무 많다.
비슷한 성공,비슷한 공부,비슷한 직업,비슷한 삶.

그러나 사람은 모두 다르다.
그러니 아이의 그림을 내가 그린 그림과 비교하지 말자.
내가 좋아하는 색을 아이에게 강요하지도 말자. 
필요한 기술은 가르치되, 상상할 자유는 남겨두자. 그리고 우리의 그림도 너무 미워하지 말자.

조금 삐뚤어진 선도,지워버리고 싶은 색도,잘못 칠한 것 같은 얼룩도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그 그림을 완성한 하나의 색이 되어 있을지 모른다.

인생에는 완성된 그림이 없다.
우리는 매일 한 줄씩,한 색씩,우리의 삶을 그려간다.

그러니 잘 그리려고 애쓰기보다 내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림은 잘 그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무엇을 담았는지가 중요하니까.]]></description>
<author>모닝뉴스 기자</author>
<pubDate>Mon, 10 Aug 2026 18:28:12 GMT</pubDate>
</item>
<item>
<title>[생각의 창] 가면을 벗을 수 있는 사람</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78572526787656016</link>
<description><![CDATA[배우는 무대에 오르기 위해 가면을 쓴다.
그러나 사람은 살아가기 위해 가면을 쓴다.

직장에서는 직장인의 얼굴을 하고, 부모 앞에서는 자식이 되며, 자녀 앞에서는 든든한 어른이 된다. 슬퍼도 웃어야 하고, 무너지고 싶어도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할 때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모두 위선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삶은 때때로 가면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칼 융은 이를 페르소나(Persona)&#8203;라고 불렀다.

원래는 연극배우가 쓰던 가면을 뜻하는 말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세상에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얼굴을 의미한다.

사람은 본능만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욕망을 절제하고, 감정을 다스리며, 타인을 배려하는 이성의 힘으로 공동체를 만들어 간다.
어쩌면 페르소나는 문명을 가능하게 한 얼굴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가면을 쓰는 데 있지 않다.
가면을 너무 오래 쓰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얼굴을 잊어버릴 수도 있다는 데 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가면이 있다.
상처를 감추기 위한 가면이 있고,
두려움을 숨기기 위한 가면이 있으며,
강해 보이기 위해 쓰는 가면도 있다.
반대로 약해 보이기 위해 쓰는 가면도 있다.
어떤 사람은 살아남기 위해 침묵을 선택한다.
또 어떤 사람은 조직과 사회가 요구하는 얼굴을 쓰며 살아간다.
그것은 자발적인 선택일 수도 있고, 생존을 위한 타협일 수도 있다.

이솝우화에는 사자 가죽을 뒤집어쓴 당나귀가 나온다.
강해 보이고 싶어서였다.
반대로 양의 탈을 쓴 늑대는 자신의 본성을 감추기 위해 가면을 쓴다.
같은 가면이지만 이유는 전혀 다르다.

현실도 그렇다.
어떤 가면은 욕망에서 태어나고,
어떤 가면은 상처에서 태어난다.
영화 속 조커는 늘 웃고 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기쁨의 표정이 아니라 세상과 자신을 향한 깊은 상처를 감춘 얼굴이다.

우리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
가장 환하게 웃는 사람이 가장 큰 아픔을 품고 살아가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사람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보는 것은 얼굴일 뿐, 마음까지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에는 한 가지 소망이 있다.
언젠가는 가면을 벗고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 주는 사람.
실수를 인정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공동체.
두려움 없이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사회.
그곳에서는 사람도 비로소 자신의 얼굴로 웃을 수 있다.

좋은 조직은 사람들에게 같은 얼굴을 강요하지 않는다.
좋은 지도자는 사람들에게 가면을 씌우는 사람이 아니라, 가면을 벗어도 안전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사람이다.

우리는 모두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그 사실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가면은 삶을 견디기 위해 잠시 빌려 쓰는 얼굴이지, 평생 살아야 할 얼굴은 아니라는 것이다.
옛사람들은 "군자는 홀로 있을 때에도 스스로를 삼간다(愼獨)"고 했다.

남들이 보는 곳에서는 가면을 쓸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보지 않는 순간의 태도만큼은 가릴 수 없다.
결국 사람을 만드는 것은 세상 앞에서 쓰는 가면이 아니라,
홀로 있을 때 지켜 낸 얼굴이다.

삶의 마지막에 우리에게 남는 질문도 하나일 것이다.
나는 누구의 얼굴로 살아왔는가.
세상이 씌워 준 가면이었을까.
아니면 끝까지 잃지 않으려 애썼던 나 자신의 얼굴이었을까.]]></description>
<author>모닝뉴스 기자</author>
<pubDate>Mon, 03 Aug 2026 11:47:47 GMT</pubDate>
</item>
<item>
<title>[생각의 창]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78539059487643016</link>
<description><![CDATA[사람은 누구나 하늘을 올려다본 적이 있다.
기쁜 날보다 힘든 날에 더 그렇다.

말로 다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을 때, 사람은 본능처럼 고개를 든다.
하늘이 답을 주어서가 아니라, 땅에서는 찾을 수 없는 답이 있을 것 같아서다.

인간은 참 위대한 존재다.
바퀴를 만들었고, 자동차를 만들었으며, 비행기를 만들어 구름 위를 날았다.
몇 시간 만에 서울과 부산을 오가고, 대륙을 넘어 지구 반대편까지 갈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키만 한 담 하나도 맨몸으로는 쉽게 넘지 못한다.
반면 작은 애벌레는 아무 장비도 없이 그 담을 오른다.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창조된 모습이 다르고,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삶도 그렇다.
우리는 노력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살아갈수록 깨닫는다.
세상에는 노력만으로 닿을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건강도, 생명도, 사랑도, 시간도 우리의 뜻대로 붙잡을 수는 없다.
그 한계를 만나는 순간, 사람은 비로소 자신을 돌아본다.

신앙을 가진 사람도 다르지 않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도 병은 찾아오고, 성실하게 살아도 뜻하지 않은 시련은 찾아온다.
그래서 사람은 묻는다.
'왜 나일까.'
그 질문은 믿음이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믿음은 그런 질문을 품은 채 다시 하루를 살아가는 용기인지도 모른다.

성경에는 욥이라는 사람이 나온다.
하루아침에 재산을 잃고, 자녀를 잃고, 건강마저 잃었다.

그는 끝없이 질문했다.
그러나 성경은 욥에게 고난의 이유를 모두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놓지 않는 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 준다.

어쩌면 삶에는 설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지도 모른다.
견디는 마음, 기다리는 믿음, 그리고 끝내 희망을 놓지 않는 태도 말이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
돼지는 하늘을 잘 보지 못한다고.
사실 여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이 품고 있는 비유다.

고개를 숙인 사람은 발밑은 볼 수 있어도 하늘은 볼 수 없다.
눈앞의 이익은 볼 수 있어도 삶의 의미는 놓칠 수 있다.
하늘은 멀리 있어서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고개를 들어야 비로소 보이는 방향이다.

그래서 사람은 하늘을 바라본다.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에만 갇히지 않기 위해서다.

희망이 있어서 하늘을 보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하늘을 바라본다.
생각해 보면 사람은 참 신기한 존재다.
높은 산은 비행기로 넘으면서도 작은 절망 하나는 넘지 못해 주저앉는다.

세상을 바꾸는 기술을 만들면서도 자신의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해 괴로워한다.
인간의 위대함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데 있지 않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데 있다.

오늘도 하늘은 아무 말이 없다.
바람도, 햇살도 누구를 가리지 않는다.
그저 같은 하늘 아래에서 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하지만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은 안다.
삶은 혼자 버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소망이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것을.

그래서 믿음은 모든 질문에 답을 얻는 일이 아니다.
답을 다 알지 못해도 다시 걸어갈 이유를 품는 일이다.

오늘도 사람은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이 가까워서가 아니라,
그 시선이 삶을 조금 더 따뜻하게 하고,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어쩌면 하늘을 바라본다는 것은,
희망을 잃지 않겠다는 사람의 가장 조용한 기도인지도 모른다.]]></description>
<author>모닝뉴스 기자</author>
<pubDate>Thu, 30 Jul 2026 14:49:54 GMT</pubDate>
</item>
<item>
<title>[오늘의 칼럼] 기억은 추억은 남는다</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78529289787640016</link>
<description><![CDATA[햇빛은 하얗게 보인다.
그러나 프리즘을 통과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안다.하얀 빛은 아무 색도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색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인생도 그렇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기억을 만든다.태어난 날도 기억이고, 첫사랑도 기억이며, 실패도 기억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그 기억들은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어떤 것은 잊힌다.어떤 것은 희미해진다.그리고 어떤 것은 평생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추억'이라 부른다.

기억은 사실이다.추억은 의미다.
기억은 머리가 저장하지만, 추억은 마음이 선택한다.

같은 교실에서 공부했던 친구들도 졸업 후에는 서로 다른 학교를 기억한다.같은 부모 아래 자란 형제도 어린 시절을 다르게 떠올린다.같은 비를 맞아도 누군가에게는 낭만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된다.

햇빛은 하나였지만, 프리즘이 달랐기 때문이다.
사람도 저마다 다른 프리즘을 품고 살아간다.

그래서 추억은 사건이 아니라 해석이다.시간이 우리에게 남긴 흔적이 아니라, 우리가 시간에 부여한 색깔이다.

젊을 때는 행복한 일만 추억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알게 된다.

가장 많이 나를 성장시킨 것은 웃음보다 눈물이었고,가장 오래 남은 가르침은 성공보다 실패였으며,가장 따뜻한 위로는 아무 말 없이 잡아주던 손 하나였다는 것을.

그제야 아픔도 추억이 된다.
신기한 일이다.
시간은 상처를 없애지 못한다.그러나 상처가 품고 있는 색을 바꾸어 놓는다.

슬픔은 이해가 되고,후회는 겸손이 되며,이별은 감사가 된다.

그래서 추억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능력이다.
같은 기억을 품고도 누군가는 평생 원망하며 살고,누군가는 그것을 사랑으로 바꾸며 살아간다.

삶의 깊이는 얼마나 많이 기억했느냐가 아니라,얼마나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보면서도 정작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다.

너무 많은 말을 들으면서도 사랑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수없이 많은 손을 잡으면서도 체온 하나 기억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보고도 알지 못하고,듣고도 듣지 못하며,만지고도 느끼지 못하는 삶.

그 삶에는 기억은 많을지 몰라도 추억은 적다.
추억은 특별한 날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늘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퇴근길에 마주친 노을.아이의 웃음.부모님의 주름.친구의 안부.익숙한 골목의 냄새.

그 순간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언젠가 그것을 추억이라 부를 수 있다.
빛은 원래 무지개였다.
다만 프리즘을 만나기 전까지는 아무도 몰랐을 뿐이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오늘 하루가 평범해 보여도,언젠가 시간이란 프리즘을 통과하면사랑, 용기, 용서, 그리움, 감사라는 빛깔로 다시 피어날 것이다.

그러니 오늘을 조금 더 천천히 바라보자.
기억을 모으기 위해서가 아니라,언젠가 아름다운 추억을 만나기 위해.
그리고 언젠가 인생의 끝자락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내 삶은 기억이 많았던 인생이 아니라, 추억이 아름다웠던 인생이었다."]]></description>
<author>모닝뉴스 기자</author>
<pubDate>Wed, 29 Jul 2026 11:41:37 GMT</pubDate>
</item>
<item>
<title>[오늘의 칼럼] 태도는 삶의 품격 </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78521094187634016</link>
<description><![CDATA[사람을 오래 만나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이 있다.
말을 아끼는 사람인지, 약속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인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인지….

우리는 그것을 성격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태도 다.
태도는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서 드러나는 삶의 언어다.

옛사람들은 사람을 알아볼 때 신언서판(身言書判)&#8203;을 살폈다.
몸가짐은 바른지, 말에는 품위가 있는지, 배움은 깊은지, 사물을 판단하는 식견은 어떠한지를 두루 헤아렸다.

그러나 그 네 가지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몸에는 마음이 담기고, 말에는 생각이 담기며, 판단에는 살아온 시간이 담긴다.
결국 사람을 드러내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다.

사람들은 좋은 습관을 만들려고 애쓴다.
일찍 일어나고, 운동을 하고, 책을 읽고, 계획을 세운다.
물론 모두 소중한 일이다.

그러나 삶은 더하는 것만으로 깊어지지 않는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릴 줄 아는 태도가 먼저다.

아무리 좋은 쌀로 지은 밥이라도 모래 한 줌이 섞이면 좋은 밥이라 할 수 없다.
삶도 그렇다.
재능이 뛰어나도 교만이 스며들면 존경을 잃고, 성실해도 거짓이 섞이면 신뢰는 오래가지 못한다.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은 거창한 실패가 아니라, 스스로 대수롭지 않게 여긴 작은 태도들일 때가 많다.

오래전부터 전해지는 김유신 장군의 이야기가 있다.
젊은 시절, 말이 습관처럼 기생집으로 향하자 다시는 그 길을 따르지 않겠다는 뜻으로 말을 베었다고 한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 이야기가 오늘까지 전해지는 이유는 분명하다.
사람은 환경을 탓하기보다 자신을 먼저 다스릴 때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는 교훈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포도나무를 가꾸는 농부의 비유가 나온다.
열매를 더 많이 맺게 하려면 먼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를 잘라낸다.
삶도 마찬가지다.

무엇을 더 가질 것인가보다 무엇을 내려놓을 것인가가 먼저다.
미움과 변명, 교만과 게으름….

우리의 삶을 무겁게 하는 것들을 덜어낼 때 비로소 새로운 열매를 맺는다.
태도는 그렇게 자란다.
태도는 거창한 결심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의 정직함, 작은 약속을 지키는 성실함, 실수를 인정하는 용기,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하는 마음….
그 작은 선택들이 쌓여 태도가 되고, 태도는 세월과 함께 인격을 빚는다.

옛말에 '군자는 홀로 있을 때에도 스스로를 삼간다(君子愼其獨)'&#8203;고 했다.
중국 유교 경전인 《중용》에 전하는 이 가르침은, 남들이 보는 곳이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는 순간의 태도가 결국 한 사람을 만든다는 뜻이다.

큰 나무는 하루아침에 숲을 이루지 않는다.
수없이 많은 계절을 견디며 뿌리를 내리고, 해마다 나이테를 더하며 마침내 거목이 된다.
사람도 다르지 않다.

생각은 삶의 방향을 정한다.
태도는 그 길을 걷게 한다.
인격은 그 길 위에서 자라고,
품격은 그 길을 오래 걸어온 사람에게서 말없이 피어나는 향기다.

오늘도 우리는 수많은 선택 앞에 선다.
무엇을 더 가질 것인가를 고민하기보다 무엇을 내려놓아야 할지를 먼저 생각해 보자.
결국 사람은 무엇을 이루었는가보다 어떤 태도로 살아왔는가 로 기억된다.
]]></description>
<author>모닝뉴스 기자</author>
<pubDate>Tue, 28 Jul 2026 12:55:41 GMT</pubDate>
</item>
<item>
<title>[모닝칼럼] 생각하는 아침에  </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78477102887602016</link>
<description><![CDATA[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세상을 배운다.
돌멩이 하나도 자동차가 되고, 나뭇가지 하나도 칼이 된다. 
목적이 없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상상력이 있고, 웃음이 있고, 살아 있음이 있다.

그래서 놀이는 아름답다.
하지만 어느 날 우리는 놀이를 뒤로하고 삶 속으로 들어선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해야 할 일이 있고, 책임져야 할 사람이 생긴다. 

누군가는 가족을 위해 일하고, 누군가는 꿈을 위해 공부하고, 또 누군가는 오늘 하루를 버티기 위해 애쓴다. 삶은 놀이가 아니다. 삶은 생존이고, 책임이며, 때로는 견뎌야 하는 시간이다.

그렇다고 삶이 즐거워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삶은 놀이보다 더 깊은 기쁨을 품고 있다. 목적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만족, 실패를 견디고 다시 일어서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성취,  소중한 사람에게 인사를 건 낼 수 있는 하루,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있다는 감사함은 어떤 오락도 대신할 수 없는 삶의 선물이다.

사람은 단순히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를 묻는 존재이다. 생각도 그렇다.

생각은 흩어진 조각을 억지로 하나의 퍼즐로 맞추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수없이 갈라지는 길 앞에 서는 일이다. 어느 길은 숲으로 이어지고, 어느 길은 절벽으로 향하며, 어느 길은 아직 아무도 가 보지 않은 들판으로 이어진다.

생각은 하나의 답을 찾는 작업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끝없이 뻗어 있는 사유의 터미널이다. 거기서 우리는 방향을 선택한다.

인생도 그렇다. 수많은 목적지 가운데 어디로 갈 것인지는 결국 자신의 몫이다. 세상은 종종 성공과 실패를 하나의 잣대로 나눈다. 뜻을 이루면 성공이고 이루지 못하면 실패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소원을 이루고도 허무한 사람이 있고,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평생 따뜻한 사람도 있다.

행복은 결과가 아니라 살아가는 태도에서 자란다.

 '새옹지마(塞翁之馬)'. 말을 잃은 것이 화인 줄 알았는데 복이 되었고, 복인 줄 알았던 일이 다시 화가 되었다. 

인생은 그렇게 쉽게 결론 내릴 수 없는 긴 이야기다. 오늘의 실패가 내일의 길이 되고, 오늘의 눈물이 훗날 누군가를 위로하는 언어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삶은 조급해서는 안 된다.  
기쁨은 남보다 앞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제보다 조금 더 나아진 자신을 만나는 데 있다.

아침 산책을 나가 보면 이슬은 누구를 위해 반짝이지 않는다. 햇살도 어느 한 사람만을 비추지 않는다. 꽃은 박수를 기대하지 않고 피고, 나무는 칭찬을 바라지 않고 계절을 견딘다.

자연은 자기 몫을 묵묵히 살아간다. 우리도 그랬으면 좋겠다. 세상이 놀이처럼 가볍게 흘러가는 날에도 삶만은 가볍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웃을 일은 웃고, 즐길 일은 즐기되, 자신의 하루만큼은 정성껏 살아냈으면 좋겠다.

인생은 누군가와 겨루는 경기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길을 끝까지 걸어가는 여행이다. 오늘도 수많은 길이 우리 앞에 열려 있다. 어느 길을 선택하든 그 길을 성실하게 걸어가는 사람에게 삶은 언젠가 가장 따뜻한 아침을 선물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된다. 삶은 놀이보다 훨씬 아름다운 것이라는 사실을. "오늘도 태양은 말 없이 떠오른다."]]></description>
<author>모닝뉴스 기자</author>
<pubDate>Thu, 23 Jul 2026 10:43:48 GMT</pubDate>
</item>
<item>
<title>[오늘의 칼럼] 도시에도 나이가 있다</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78468623587597016</link>
<description><![CDATA[그리스 신화에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가 나온다.
"아침에는 네 발, 낮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은 무엇인가."
정답은 인간이다. 갓난아이는 네 발로 기고, 청년은 두 발로 걷고, 노인은 지팡이를 짚는다. 사람은 누구나 성장하고, 성숙하며, 늙어간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도시에도 나이가 있을까.
거제는 지금 몇 살일까.
인구가 줄었다고 늙은 도시일까. 조선업이 살아났다고 다시 젊어진 도시일까. 어느 하나만으로는 쉽게 답하기 어렵다.

사람도 체중 하나만으로 건강을 판단하지 않는다. 혈압과 혈당, 심장과 폐, 간과 신장을 함께 살펴야 비로소 몸 상태를 알 수 있다. 도시도 다르지 않다.
인구는 도시의 몸집일 뿐이다.

도시의 진짜 나이는 평균연령이 말해줄 수도 있고, 생산가능인구가 말해줄 수도 있다. 청년들이 모여드는 도시인지, 신혼부부가 아이를 낳고 키우는 도시인지, 학교 운동장에 아이들 웃음소리가 여전한지, 관광객은 스쳐 가는지 머무는지, 새로운 산업이 자라고 있는지…. 이 모든 것이 모여 도시의 현재를 보여준다.

한때 미국 디트로이트는 세계 자동차 산업의 심장이었다. 그러나 산업 하나에 의존한 도시는 긴 침체를 겪었다. 반대로 스웨덴의 말뫼는 조선산업이 쇠퇴한 뒤 대학과 연구개발, 친환경 산업을 키우며 다시 젊은 도시로 거듭났다.

도시의 나이는 시간이 아니라 선택이 결정한다는 사실을 두 도시는 보여준다.

거제 역시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다.
조선업의 회복은 분명 반가운 소식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도시의 미래가 보장되지는 않는다. 청년이 머물고 싶은 도시인지, 아이를 키우기 좋은 도시인지, 문화와 교육이 삶의 품격을 높여주는 도시인지, 새로운 산업이 자라날 토양을 갖추고 있는지가 앞으로 거제의 나이를 결정할 것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제는 늙었다'거나 '거제는 아직 젊다'는 성급한 결론이 아닐지 모른다.
먼저 거제를 제대로 진단하는 일이다.

사람은 건강검진을 통해 몸을 돌아본다. 도시도 가끔은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거제는 지금 몇 살일까.

이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에서 우리는 거제의 현재뿐 아니라, 어떤 도시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고 싶은지도 함께 생각하게 될 것이다.]]></description>
<author>모닝뉴스 기자</author>
<pubDate>Wed, 22 Jul 2026 11:10:35 GMT</pubDate>
</item>
<item>
<title>[오늘의 칼럼]우민화는 진화한다</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78459871487590016</link>
<description><![CDATA[한때 영화관에서는 영화보다 먼저 봐야 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대한뉴스'다.

대통령의 지방 순시, 새마을운동, 수출 실적, 대형 국책사업…. 짧게는 몇 분 남짓한 영상이었지만 당시로서는 가장 강력한 대중매체였다. 텔레비전이 흔치 않던 시절, 국민은 영화를 보기 위해 자연스럽게 국가가 준비한 뉴스를 함께 봐야 했다.

오늘의 시각으로 보면 일종의 국가 홍보였다. 당시에는 그것이 당연한 시대였다.

그래서 독재정권을 설명할 때 종종 등장하는 말이 '우민화'다. 하지만 우민화를 단순히 국민을 바보로 만드는 정책으로 이해하면 본뜻을 놓치기 쉽다. 정치학적으로는 국민이 비판적으로 사고할 기회를 줄이고, 권력이 원하는 방향으로 현실을 인식하도록 유도하는 통치 방식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지식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판단의 폭을 좁히는 것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에도 그런 방식이 가능할까.
오히려 지금은 정반대의 시대다. 방송은 셀 수 없이 많고, 유튜브와 SNS는 하루에도 수천 개의 콘텐츠를 쏟아낸다. 누구나 방송국을 만들 수 있고 누구나 뉴스를 생산할 수 있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우민화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치학은 조금 다른 설명을 내놓는다.
'의제설정(Agenda Setting)'이라는 이론이 있다. 언론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를 강요하지는 못하지만, 무엇을 생각하게 만들지는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안을 매일 반복해서 보여주면 사람들은 그것을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여기기 시작한다.

'프레이밍(Framing)'도 있다. 같은 사실이라도 어떤 틀로 설명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세금을 '복지 투자'라고 부를 수도 있고 '국민 부담'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사실은 같아도 받아들이는 감정은 달라진다.

여기에 최근에는 '주의(관심)경제(Attention Economy)'라는 개념이 더해졌다. 오늘날 가장 희소한 자원은 돈이 아니라 사람의 주의력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시간을 오래 붙잡는 사람이 영향력을 갖는다. 그래서 플랫폼은 더 오래 머물게 하는 알고리즘을 만들고, 방송은 더 자극적인 화면을 고민하며, 정치는 더 강한 메시지를 찾는다.

돌이켜보면 권력의 기술도 함께 변했다.
과거에는 정보를 독점하려 했다.
지금은 관심을 독점하려 한다.
예전에는 무엇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면, 이제는 무엇을 계속 보게 할 것인가가 더 중요해졌다.

정치만 그런 것은 아니다.
기업도 그렇고 플랫폼도 그렇다. 인간의 욕망과 분노, 호기심과 불안을 붙잡는 일이 거대한 산업이 되었다. 분노는 클릭을 만들고, 공포는 공유를 낳으며, 편 가르기는 충성도를 높인다. 인간의 본성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이용하는 기술은 놀랄 만큼 정교해졌다.
그래서 오늘의 사회를 굳이 표현한다면 우민화의 시대라기보다 시선의 시대인지도 모른다.

국민을 침묵시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말하게 하고, 생각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할 틈을 없애는 방식이다.
대한뉴스는 오래전에 막을 내렸다.
그러나 사람의 시선을 얻으려는 경쟁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해졌다.

국가는 여론을 얻고 싶어 하고, 정당은 지지를 얻고 싶어 하며, 기업은 소비자의 시간을 사고 싶어 한다. 목적은 서로 달라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는 본능은 크게 다르지 않다.

민주주의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하나의 의견이 아니다. 다른 의견을 만날 기회가 사라지는 것이다. 다양한 정보 속에 사는 것 같지만, 결국 비슷한 정보만 반복해서 소비하게 된다면 그것 역시 또 다른 형태의 편향일 수 있다.

권력은 시대마다 옷을 갈아입는다.
한때는 명령으로 사람을 움직였고, 한때는 검열로 사람을 통제했다.
지금은 더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다가온다.
재미라는 이름으로, 편리함이라는 이름으로, 맞춤형 추천이라는 이름으로.

권력은 언제나 사람을 움직이려 했다. 달라진 것은 권력의 목적이 아니라, 명령하는 방식에서 유혹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는 사실뿐이다.
]]></description>
<author>모닝뉴스 기자</author>
<pubDate>Tue, 21 Jul 2026 10:51:54 GMT</pubDate>
</item>
<item>
<title>[오늘의 칼럼] 권위는 섬김에서 나온다</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78451746987586016</link>
<description><![CDATA[신을 믿는 사람들은 말한다.

신은 인간을 창조할 때 생명만 준 것이 아니라, 왜 살아야 하는지 존재의 이유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삶의 사용설명서도 함께 남겼다.
경전이 있는 목적은 공동체를 바르게 세우는 것이다. 종교는 인간을 지배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를 다스리도록 돕기 위해 존재한다.

정치 또한 다르지 않다. 정치는 국민을 지배하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자유와 질서를 조화시키는 공적 제도다.

그러나 역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해 왔다.
종교는 권력이 되었고, 정치는 신앙이 되었다.

종교가 타락하는 과정은 의외로 단순하다.
처음에는 신을 전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축복을 팔기 시작한다. 신앙을 거래로 만들고 하나님의 은혜를 물질적 성공과 맞바꾸려 한다. 관계가 거래로 변하는 순간 종교는 본질을 잃는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비전보다 선심을 앞세우고, 정책보다 구호를 반복하며, 국민을 시민이 아니라 표로만 바라본다. 설득보다 선전에 익숙해지고, 토론보다 팬덤에 의존하며, 공익보다 진영의 승리를 우선한다.
그때부터 정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신앙이 된다.

윤리가 무너지면 권위도 함께 무너진다.
강단에서는 거룩을 말하면서 삶에서는 탐욕을 보이고, 정의를 외치면서 뒤에서는 권력을 계산한다. 말씀보다 사람이 앞서고 신보다 지도자가 앞서는 순간 종교는 스스로 권위를 잃는다.

정치도 다르지 않다.
공정을 말하면서 자기 편에는 관대하고, 법치를 외치면서 자신에게는 예외를 만든다.
국민은 말보다 삶을 기억한다.
정치의 수준은 연설이 아니라 실천으로 평가된다.

역사를 잊는 것도 공통된 병이다.
종교개혁은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한 운동이 아니라 교회를 본래의 자리로 돌려놓기 위한 운동이었다.
권위는 하나님께 있었지만, 교회는 어느 순간 그 권위를 자신에게 귀속시키려 했다.
섬김은 지배가 되었고, 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보다 조직을 향한 충성이 되었다.

민주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민주주의에서 권위는 국민에게 있다.
정치인은 국민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이지 권위의 주인이 아니다. 그런데 그 권한을 자신의 소유인 양 착각하는 순간 정치는 봉사가 아니라 지배로 변한다.

교회가 기업이 되면 교인은 고객이 되고, 정당이 기업이 되면 국민은 소비자가 된다.
교인 수와 헌금이 성공의 기준이 되고, 조직과 후원금이 정치의 실력이 된다.
본질은 사라지고 숫자만 남는다.
사람을 세우기보다 조직을 키우는 데 몰두하는 순간 공동체는 방향을 잃는다.

가장 위험한 것은 비판을 막는 일이다.
질문하지 말라는 종교는 건강하지 않다.
비판하지 말라는 정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목사를 비판하면 벌을 받는다."
"우리 편을 비판하면 배신자다."
두 문장은 서로 다른 영역에서 나왔지만 구조는 같다.
비판이 사라진 조직은 스스로를 고칠 능력을 잃는다.
민주주의는 견제가 있을 때 건강하고, 종교는 성찰이 있을 때 살아 있다.

지도자가 특권을 당연하게 여기는 순간 공동체는 쇠퇴한다.
희생을 말하지만 자신은 희생하지 않고, 검소를 말하지만 스스로는 예외가 된다.
국민에게는 허리띠를 졸라매라고 하면서 자신은 더 많은 권한과 예우를 요구하고, 신도에게는 헌신을 말하면서 자신은 화려한 삶을 누린다.
그 순간 지도자는 신뢰를 잃는다.

정치학자 막스 베버는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권력이 아니라 권위의 정당성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또한 로베르트 미헬스는 모든 조직은 성장할수록 소수 지도부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과두제의 철칙'&#8203;을 경고했다.

두 사람의 통찰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종교든 정치든 조직이 본래의 사명보다 자신을 유지하는 데 몰두하는 순간, 공동체는 생명력을 잃고 기득권의 성으로 변해간다.
종교를 보면 나라가 보이고, 정치를 보면 국민의 수준이 보인다.

종교가 양심을 잃으면 사회의 도덕이 흔들리고, 정치가 토론을 잃으면 민주주의가 흔들린다.
국민이 비판을 멈추면 정치인은 우상이 되고, 신도가 질문을 멈추면 종교지도자는 절대권력이 된다.
신은 인간에게 존재의 이유와 삶의 사용설명서를 남겼지만, 인간은 언제나 그 설명서보다 자신의 욕망을 앞세우려 했다.
성경은 그 사용설명서를 말로만 전하지 않았다.

예수는 자신을 높이는 호칭으로 권위를 세우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메시아보다 '인자'&#8203;(사람의 아들)라 부르며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김을 실천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것으로 권위는 높은 자리에 앉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낮아지는 데서 완성된다는 사실을 삶으로 보여준 것이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국민 위에 군림하는 지도자는 권력을 가질 수는 있어도 권위를 얻지는 못한다.
역사는 그 결과를 반복해서 증명해 왔다.

권위는 섬김에서 나오고, 권력은 견제받을 때 비로소 정당성을 얻는다. 그것이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이며 민주주의가 살아남는 길이다.
]]></description>
<author>모닝뉴스 기자</author>
<pubDate>Mon, 20 Jul 2026 12:17:49 GMT</pubDate>
</item>
<item>
<title>[오늘의 칼럼] 국회 방문은 이력(履歷) 국비 확보는 실력(實力) </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78399356587568016</link>
<description><![CDATA[변광용 거제시장이 취임 직후부터 국회와 중앙부처를 잇달아 찾고 있다. 해양관광 인프라 확충, 광역교통망 구축, 조선산업 경쟁력 강화 등 굵직한 현안을 들고 국회의원과 정부를 만나 협조를 요청하는 모습이다.

지방자치단체장이 국책사업과 대형 SOC 사업을 위해 중앙정부와 국회를 찾는 것을 비판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국가 예산과 법률, 제도 개선이 필요한 사업이라면 시장이 직접 발품을 파는 것은 당연한 책무다.

문제는 서울에 갔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가져왔느냐에 있다.

변 시장은 지방선거 당시 "힘 있는 여당, 힘 있는 시장"을 강조했다. 중앙정부와 여당, 국회를 연결하는 정치적 네트워크를 강점으로 내세웠고, 그것이 거제 발전의 동력이 될 것이라고 호소했다. 취임 이후 이어지는 국회와 중앙부처 방문은 이러한 공약을 실천하는 첫 행보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시민의 평가는 다르다.

행정학에서 정책 평가는 크게 네 단계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투입(Input)이다. 국회를 방문하고, 장관을 만나고, 국회의원에게 건의서를 전달하는 단계다. 이는 정책 추진의 출발점이며 필요조건이다.

두 번째는 과정(Process)이다. 정부 부처 협의와 기획재정부 검토, 국가계획 반영 여부, 국회 예산심의 등 정책이 실제로 움직이는 행정 절차가 이어진다.

세 번째는 산출(Output)이다. 국비가 얼마 확보됐는지, 예비타당성조사 대상사업으로 선정됐는지, 국가계획에 사업이 반영됐는지가 여기에 해당한다.

마지막은 성과(Outcome)다. 도로가 착공되고 철도가 연결되며, 관광객이 늘고 기업이 투자하고 일자리가 생기는 변화가 바로 시민이 체감하는 행정의 결과다.

시민들이 "서울만 자주 간다"는 말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회 방문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행정은 투입보다 산출을, 과정보다 성과를 요구하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시장의 일정이 아무리 분주해도 시민은 결국 "그래서 무엇이 달라졌는가"를 묻는다.

이는 민간기업의 경영과도 닮아 있다. 기업의 최고경영자가 투자자를 수십 차례 만났다는 사실보다 실제 투자 유치 규모와 기업 성장으로 평가받듯, 지방자치단체장 역시 국회 방문 횟수가 아니라 확보한 국비와 추진한 국가사업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변 시장이 스스로 내세웠던 '힘 있는 여당, 힘 있는 시장'이라는 정치적 메시지를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중앙과의 원활한 소통이 강점이라면, 그 강점은 방문 횟수가 아니라 예산 확보와 사업 성과로 증명되어야 한다. 그것이 선거에서 약속한 정치적 자산을 행정적 성과로 연결하는 길이다.

물론 대형 국책사업은 하루아침에 결실을 맺지 않는다. 국가계획 반영부터 예비타당성조사, 기본계획 수립, 예산 확보까지 수년이 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국회와 중앙부처를 찾는 일 자체를 비판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만큼 홍보의 초점도 달라질 필요가 있다. "누구를 만났다"는 소식보다 "무엇을 이끌어냈다"는 결과가 시민의 신뢰를 얻는다.

행정은 보여주는 일이 아니라 증명하는 일이다.
국회 방문은 행정의 이력(履歷)이다. 그러나 국비 확보는 행정의 실력(實力)이다.

결국 시민은 시장이 서울을 몇 번 다녀왔는지를 기억하지 않는다. 거제를 위해 무엇을 가져왔는지를 기억한다.
]]></description>
<author>모닝뉴스 기자</author>
<pubDate>Tue, 14 Jul 2026 10:46:05 GMT</pubDate>
</item>
<item>
<title>[모닝뉴스] 느거 와그라노</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78391336987563016</link>
<description><![CDATA[경상도 사람들은 "밥 뭇나?"라고 묻는다. "밥 먹었니?"보다 정겹고, "식사는 하셨습니까"보다 사람 냄새가 난다.

"덥노."
"춥노."
"무섭노."
누군가에게는 어릴 적 골목에서 매일 듣던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단어가 죄인이 됐다.

'무섭노'를 둘러싼 논란은 처음엔 웃고 넘길 일처럼 보였다. 하지만 정치권이 뛰어들고, 언론이 받아쓰고, 온라인이 들끓으면서 사투리 하나가 사상검증의 대상이 됐다.

언어는 사람을 이어주는 다리인데, 우리는 그 다리부터 의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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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특정 온라인 커뮤니티가 일부 표현을 왜곡해 사용한 일은 분명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생활 속 사투리까지 오염된 언어로 취급한다면, 그다음 차례는 무엇일까.

억양도 검증하고, 말끝도 감별하고, 농담도 허가받아야 하는 세상이 오는 것은 아닐까.
거제 출신 가수 강산에는 오래전 '와그라노'를 불렀다.

노래 제목은 짧지만 질문은 길다.
왜 그러느냐.
정말 왜 그러느냐.

요즘 우리 사회는 단어보다 맥락을 덜 듣는다.
사람보다 프레임을 먼저 본다.
설명은 길어지고, 낙인은 더 빨라졌다.

누군가의 말은 끝까지 듣지 않으면서, 한 단어는 끝까지 따라다닌다.

언론도 예외는 아니다.
논란을 전하는 것과 논란을 키우는 것은 다르다.
갈등은 사실보다 빨리 퍼지고, 정정은 화제만큼 멀리 가지 못한다.

정치도 다르지 않다.
정치는 국민의 언어를 이해해야 하는데, 어느새 국민의 말을 검열하려 든다.

사투리는 지역의 역사이고 생활이다.
사람이 살아온 시간이다.
그것을 한순간에 낙인의 언어로 바꾸는 일은 너무 가볍다.

'무섭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람을 쉽게 재단하는 사회다.
강산에는 오래전 노래로 물었다.

"와그라노."
2026년 여름, 우리도 같은 질문을 남긴다.
정말,
와그라노.

<b>강산에는 거제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했고, 2002년 발표한 '와그라노'는 경상도 사투리만으로 만든 독특한 노래다. 문화체육관광부도 이 곡을 '지역 방언의 아름다움을 담은 노래' 사례로 소개한 바 있다.</b>
]]></description>
<author>모닝뉴스 기자</author>
<pubDate>Mon, 13 Jul 2026 12:29:29 GMT</pubDate>
</item>
<item>
<title>[오늘의 칼럼] 익숙한 길</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78390873887560016</link>
<description><![CDATA[사람은 익숙한 길을 택한다. 오랫동안 거리에서 문제를 풀어온 사람에게 피켓은 가장 익숙한 언어다. 그러나 시민의 대표가 된 순간부터는 피켓보다 설명이, 압박보다 설득이 먼저 요구된다.

13일 오전 거제시청 출입구.

민원인들이 드나드는 입구 한편에 흰색 보드가 세워졌다. 보드에는 '새거제신문 편파보도, 마녀사냥 고발한다'는 문구와 함께 '김경습 거제시의원'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며칠 전 본회의장 폭언 논란의 당사자였던 현직 시의원이 이번에는 지역 언론사를 상대로 공개 항의에 나선 것이다.

논란은 지난 3일 열린 제263회 거제시의회 임시회 제2차 본회의에서 시작됐다.

국민의힘 김동수 의원의 의사진행 발언 도중 더불어민주당 김경습 의원이 "협박하는 것이냐"고 말했고, 이어 "입 닥쳐요", "둘이서 한 번 붙을라요" 등의 발언을 했다는 내용이 본회의 속기록과 회의 영상에 남았다.

이후 김동수 의원은 김경습 의원에 대한 징계요구서를 제출했고, 민주당도 상임위원 강제 배정에 반발하며 의장석을 점거한 김동수·김영규 의원에 대한 맞징계를 요구하면서 갈등은 윤리특별위원회로 넘어갔다.

새거제신문은 회의록과 영상 등을 근거로 이 같은 내용을 보도했다. 이에 김경습 의원은 해당 보도가 편파적이며 자신을 '마녀사냥'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새거제신문은 김 의원이 SNS를 통해 항의했고 반론 기회를 제안했으나 응하지 않았다고 재차 보도했다. 김 의원은 결국 시청 앞에 보드를 세우고 언론사를 향한 공개 비판에 나섰다.

이로써 의회 안에서 시작된 갈등은 언론과 정치인의 충돌로까지 번졌다.

이번 논란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피켓 자체가 아니다.
김경습 의원은 오랫동안 노동운동 현장에서 활동해 온 인물이다. 

노동현장에서 피켓은 자신의 주장을 알리고 상대를 압박하는 가장 익숙한 표현 방식이다. 사용자와 노동조합이 대립하는 현장에서 거리의 목소리는 때로 가장 강력한 협상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시의원이 된 순간부터는 다른 역할이 요구된다.
노동운동은 사용자와 교섭하는 정치이고, 지방의회는 시민을 설득하는 정치다. 

같은 갈등이라도 역할이 달라지면 해결의 문법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거리의 정치가 압박과 결집을 통해 힘을 얻는다면, 대의정치는 설명과 설득을 통해 시민의 신뢰를 얻는다.

언론 보도가 사실과 다르다고 판단할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다. 공인 역시 언론을 비판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시민이 먼저 궁금해하는 것은 언론을 향한 분노가 아니라 무엇이 사실과 달랐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어느 대목이 왜곡됐고, 어떤 맥락이 빠졌으며, 무엇이 편파라고 판단하는지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 공인의 언어다.

피켓은 자신의 의사를 드러내는 수단일 수는 있다. 그러나 피켓은 설명을 대신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에서 언론은 권력을 감시하고, 공인은 그 감시에 답할 책임을 진다. 언론 보도가 부당하다면 반론과 정정보도, 기자회견, 언론중재 등 제도적 절차를 통해 시민을 설득하는 것이 공인의 책무에 더 가깝다.

이번 논란은 단순히 한 시의원과 한 언론사의 충돌이 아니다. 공인이 비판을 받았을 때 어떤 방식으로 시민과 소통할 것인가를 묻는 질문이다.

거리의 언어는 세상을 흔들 수 있다. 그러나 의회의 언어는 시민을 설득할 때 비로소 힘을 얻는다. 피켓은 자신의 의사를 드러낼 수 있지만 설명을 대신할 수는 없다. 시민이 공인에게 먼저 기대하는 것은 구호가 아니라 근거이고, 항의보다 설명이다.]]></description>
<author>모닝뉴스 기자</author>
<pubDate>Mon, 13 Jul 2026 11:12:18 GMT</pubDate>
</item>
<item>
<title>“거제 보수, 재건이 아니라 혁신이다”</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78330393887536016</link>
<description><![CDATA[ 최근 거제 6.3 지방 선거 결과를 두고 지역 보수 진영에서는 보수재건의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그러나 재건이라는 표현은 현실과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재건보다는 ‘혁신’이라는 표현이 현 상황과 더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용어 선택에 신중한 이유는 하나이다. 용어가 개념을 정리하고 개념은 현상을 담아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는 이정표이기 때문이다. 

  이번 지방 선거 결과는 보수 진영 입장에서는 충격적이지만, 보수가 궤멸 되었다고 판단할 근거는 없다. 필자는 이번 선거에 당사자로 출마하였고 선거 현장에서 지지자들의 열망과 울분을 직접 체험하였기에, 이번 결과를 바라보는 현실과 문제의식을 말할 자격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보수 붕괴를 전제한다면 다음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정당 지지율의 현저한 하락, 둘째, 당원 등 주요 인사들의 현저한 진영이동, 셋째 시민 표심의 뚜렷한 이탈이다. 그러나 선거 결과를 보면 그러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먼저, 선거 결과를 보자. 편의상 후보자 중심으로 민주당, 국민의힘 총계로만 분석하였다. 시장득표율은 민주당 61%, 국민의힘 39%, 도의원은 민주당 55.9%, 국민의힘 44.1%, 시의원은 민주당 59.7%, 국민의힘 40.4%로, 개략적으로 6:4 구조이다. 득표율은 국민의힘 정당 지지도와 큰 차이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과거 선거 지형 5:5 대비 10%의 격차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문제가 남는다. 승자독식의 선거제도는 차치하고 필자는 나를 포함한 후보들 개개인의 역량 문제와 선거 지형과 전략의 불일치에서 우선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음 원인으로는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선거와 달리 이념보다 실리에 따라 투표하는 지방 선거의 특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특히 거제와 같은 지방 도시의 선거는 도시보다 심할 것이다. 중간의 10%는 판세가 우세한 쪽으로 쏠리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거제의 직전 재선거 특수성과 맞물리며 쏠림현상이 더욱 가속화된 것으로 판단된다. 

  작년은 거제시장 재선거가 있었다. 통념상 짧은 임기의 재선거 당선은 다음 선거 후보자 내정이라고 해석함이 타당하다. 즉, 민주당 시장 후보는 1년 2개월을 체계적으로 준비하였고, 국민의힘 후보는 3개월을 어렵게 준비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민주당은 미리 내정된 시장 후보 중심으로 도의원, 시의원 후보가 조직화 되었지만, 국민의힘은 그렇지 못했다. 2025년 재선거가 치러졌던 거제시&#8226; 아산시&#8226;구로구청은 민주당 후보가, 김천시는 국민의힘 후보가 각각 재당선된 것은 결코 우연으로만 보기 어렵다. 같은 정당 후보가 연이어 승리한 현상은 선거 준비 기간과 조직력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이번 선거에서 제일 안타까운 점은 거제의 직전 선거 특수성이 국민의힘 당 차원에서 충분히 고려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국민의힘 시장 후보자가 미리 정해지고 그를 중심으로 도의원, 시의원 후보가 미리 조직화 되었다면 선거 결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이번 선거 결과는 예견된 결과인지도 모른다.

 필자는 보수의 정신을 지지하는 사람이다. 거제에서 보수 진영이 이번 선거 결과에 착시의 패배감에 매몰되지 않고 굳건하게 서기를 간절히 바란다. 거제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도 건재한 보수는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보수 진영의 혁신은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라 생각한다. 

  실패는 새로운 시대적 요구사항을 낳으면서 발전하기 마련이다. 낡은 지도로 새로운 세상을 탐험하지 못한다. 과거의 방식으로 미래를 준비할 수도 없다. 보수혁신을 위해서는 새로운 패러다임, 새로운 조직 체계, 새로운 선거관리 시스템, 새로운 정당 문화도 필요할 것이다. 필자는 이번 선거 현장에서 보수에 대한 열망을 보았다. MZ세대의 분출하는 실용 보수에 대한 열망, 40대 50대의 합리적 보수, 60대 이상에서의 강한 보수에 대한 간절함도 함께 보았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 MZ세대와 기존 세대를 아우르는 보수의 혁신을 위해 어떤 그릇을 만들 것인지가 지금 거제 보수 진영에 던져진 핵심과제다. 즉, 거제 보수는 재건이 아니라 혁신을 요구받고 있는 시점이다. 

  혁신은 보수의 가치를 시대정신에 맞게 큰 틀을 다시 만드는 일이어야 한다. 과거의 승리를 복원하는 구호가 아니라, 미래의 승리를 설계하는 혁신의 실천이어야 한다. ]]></description>
<author>모닝뉴스 기자</author>
<pubDate>Mon, 06 Jul 2026 11:12:18 GMT</pubDate>
</item>
<item>
<title>[오늘의 칼럼]  의장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78330048887535016</link>
<description><![CDATA[맹자는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은 아주 작은 차이일 뿐이며(人之所以異於禽獸者幾希), 군자는 그것을 지키고 범인은 그것을 잃는다"고 했다. 그 작은 차이가 바로 염치다. 

또 "부끄러워하고 옳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無羞惡之心 非人也)"라고 했다. 법은 사람의 행동을 규율하지만, 염치는 스스로를 절제하게 한다. 공동체를 오래 지탱하는 힘은 권력이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볼 줄 아는 마음이다.

제10대 거제시의회 원 구성 과정은 이 오래된 가르침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의장 선출부터 상임위원회 구성, 상임위원장 선출에 이르기까지 거제시의회는 개원 첫 주부터 극심한 갈등을 노출했다. 상임위원회 배정 변경 논란은 본회의 부결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이어졌고, 원안 복귀 뒤에도 야당의 전면 보이콧 속에서 민주당 단독으로 상임위원장이 선출됐다. 법적 절차는 마무리됐지만, 협치와 의장의 중립성에 대한 의문은 오히려 더 커졌다.

이번 사태는 단순히 상임위원장 세 자리를 어느 정당이 차지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의장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자리인가를 다시 묻는 사건이었다.

의장은 다수당의 대표가 아니다. 더욱이 집행부의 우군은 더더욱 아니다. 시민이 부여한 권한으로 의회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지키는 사람이다. 의사봉은 다수당의 의사를 관철하는 도구가 아니라 서로 다른 민의를 조정하는 상징이어야 한다.

지역 정치권 일각에서는 행정복지위원회의 구성을 둘러싼 논란을 두고 민주당이 변광용 시장 체제의 핵심 정책을 보다 안정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상임위원회의 주도권을 확보하려 했던 것 아니냐는 정치적 해석도 나온다. 사실 여부와 별개로 이러한 해석이 제기됐다는 사실 자체가 의회의 독립성과 의장의 중립성에 적지 않은 의문을 남긴다.

지방의회는 집행부를 지원하기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 아니다. 시민을 대신해 집행부를 감시하고 견제하기 위해 존재하는 대의기관이다.

조선은 이를 위해 사헌부와 사간원, 이른바 대간(臺諫)을 두었다. 대간은 왕에게 충성하는 관료가 아니라 공론에 충성하는 관료였다. 왕의 뜻과 다르더라도 잘못이 있으면 서슴없이 간쟁했고, 권력이 아니라 공론을 두려워했다. 조선 정치가 500년을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왕권이 강해서가 아니라 왕에게도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제도가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지방의회도 다르지 않다. 시장이 같은 정당 소속이라는 이유로 의회가 먼저 집행부의 입장을 헤아리기 시작한다면 견제와 균형은 형식만 남는다. 시민은 시장을 도와줄 사람을 의장으로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게도 필요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의장으로 선출한다.

의장은 갈등을 확대하는 사람이 아니라 갈등을 조정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법적으로 가능한 길보다 정치적으로 신뢰받는 길을 먼저 선택해야 한다. 법은 최소한의 기준을 제시할 뿐이며, 의회의 품격은 그 기준을 넘어서는 절제에서 비롯된다.

며칠 전 논란이 됐던 의사정족수 문제 역시 같은 맥락이다. 회의를 열 수 있는 요건을 갖췄다는 사실과 시민으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다. 지방자치법은 개의 요건을 규정하지만, 시민의 신뢰까지 보장하지는 않는다. 절차적 적법성과 정치적 정당성은 결코 같은 의미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다수결로 운영된다. 그러나 다수결은 민주주의의 전부가 아니다. 다수는 권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그 권력이 존중받는 이유는 절제하기 때문이다. 협치는 다수당이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질서다.

춘추시대 제나라를 패자의 반열에 올려놓은 명재상 관중의 이름을 딴 《관자》는 국가를 떠받치는 네 개의 기둥으로 예(禮)·의(義)·염(廉)·치(恥)를 꼽는다. "예의염치는 나라의 네 기둥이며(禮義廉恥 國之四維), 그 네 기둥이 무너지면 나라 또한 무너진다(四維不張 國乃滅亡)." 2천700여 년 전의 이 경계는 오늘날 지방의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의회를 세우는 것은 법이고, 의회를 존경받게 하는 것은 염치다. 다수 의석은 시민이 맡긴 권한일 뿐 시민 위에 군림하라는 허가장이 아니다. 의장은 시장의 성공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시민을 대신해 의회의 독립성과 품격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다.

거제시의회가 이번 원 구성 과정에서 얻어야 할 교훈은 상임위원장 세 자리가 아니다. 의회가 집행부의 '2중대'라는 의심을 받는 순간 시민의 신뢰는 무너지고, 의장이 중재자의 자리를 떠나는 순간 의회의 권위도 함께 흔들린다. 결국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것은 숫자가 아니라 품격이며, 그 품격의 다른 이름이 바로 염치다.
]]></description>
<author>모닝뉴스 기자</author>
<pubDate>Mon, 06 Jul 2026 10:14:48 GMT</pubDate>
</item>
<item>
<title>“대통령의 언어는 비유보다 품격이어야 한다”</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78269655287511016</link>
<description><![CDATA[대통령의 말은 곧 국가의 말이다. 한 개인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비유와 대통령이 공적인 자리에서 사용하는 비유는 같은 표현이라도 무게가 다르다. 

대통령의 한마디는 지지자에게는 신호가 되고, 반대하는 국민에게는 국가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메시지가 된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은 "부처 눈에는 부처가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가 보인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불교에서 널리 전해지는 비유로, 사람은 자신의 마음과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그 취지 자체를 문제 삼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통령의 언어는 의도만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국민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도 함께 평가받는다.

'부처'와 '돼지'를 대비하는 순간, 비록 특정인을 지목하지 않았더라도 자신을 비판하는 국민이나 반대 의견을 가진 국민을 '돼지'에 빗댄 것 아니냐는 비판은 충분히 제기될 수 있다. 

대통령이 그런 의도를 가졌는지와는 별개의 문제다. 공인의 언어는 의도보다 사회적 효과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정치가 극단적으로 양분된 시대일수록 대통령은 오해를 부를 수 있는 비유를 경계해야 한다. 국민을 설득하는 언어는 상대를 상징적으로 낮추는 표현이 아니라, 원칙과 사실로 설명하는 언어여야 한다.

대통령에게는 표현의 자유가 있다. 그러나 그 자유만큼이나 언어의 책임도 크다. 대통령의 말은 국민을 갈라놓는 도구가 아니라 국민을 하나로 묶는 다리가 되어야 한다.

국민은 대통령이 모든 비판을 받아들이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대통령의 언어만큼은 누구도 모욕받았다고 느끼지 않는 품격을 지켜주기를 기대한다. 그것이 국가 지도자의 언어가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절제이며, 통합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언어는 재치 있는 비유보다 신중한 원칙이, 강한 표현보다 넓은 포용이 먼저여야 한다. 그것이 국민 모두의 대통령으로 남는 길이다.
]]></description>
<author>모닝뉴스 기자</author>
<pubDate>Mon, 29 Jun 2026 10:29:12 GMT</pubDate>
</item>
<item>
<title>[오늘의 칼럼] 취임식은 정치의 시작인가</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78244080987508016</link>
<description><![CDATA[새로운 시장의 취임은 축하받을 일이다. 시민의 선택을 받은 공직자가 시정을 이끌 새로운 출발선에 섰기 때문이다. 그래서 취임식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 취임식은 시장 개인의 영광을 기념하는 행사가 아니라, 시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 앞에서 책임을 다짐하는 공적 의례여야 한다.

거제시는 오는 7월 1일 저녁 7시 민선시장의 취임식을 시청이 아닌 장승포 흥남철수기념공원 광장에서 개최하기로 했다. 

장소 선택에는 나름의 상징성이 담겨 있을 것이다. 흥남철수의 인도주의 정신을 시정의 출발점으로 삼겠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장승포권의 역사성과 지역 균형발전을 강조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공공행정에서 상징은 언제나 설명을 필요로 한다.

시청이라는 상징적 공간이 있음에도 외부 장소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지, 왜 추가적인 예산과 행정력을 투입해야 하는지, 그 선택이 시민에게 어떤 공익적 가치를 더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시민 앞에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이 질문은 취임식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공공예산을 사용하는 모든 행정은 시민의 이해와 공감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묻는 것이다.

더욱이 취임식이 업무시간 이후 열릴 경우에는 또 다른 문제가 제기된다. 행사는 끝나도 행정을 지원하는 공무원들의 업무는 끝나지 않는다. 

시설 운영, 의전, 안전관리, 홍보, 행사 지원 등 추가적인 행정력이 뒤따른다. 법적으로 가능하다는 것과 행정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은 같은 의미가 아니다.

공공예산은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이 납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정당성을 얻는다.

심리학에서는 미완의 경험을 완성하려는 인간의 욕구를 설명하는 '자이가르닉 효과(Zeigarnik Effect)'가 있다. 끝맺지 못한 일은 오래 기억에 남고, 언젠가는 마침표를 찍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다는 이론이다.

변광용 시장은 2018년 첫 취임식은 태풍 ‘빠라쁘론’이 닥쳤고 2025년 재선거 때는 산불과 경제위기 상황때문에 취임식을 취소했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취임식이 그동안 이루지 못했던 의례를 비로소 완성하는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물론 이는 심리학적 관점에서 가능한 하나의 해석일 뿐, 실제 의도를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치는 의도가 아니라 결과로 평가받는다.

시민이 기억하는 것은 취임식이 어디에서 열렸는가가 아니다. 그날 어떤 약속을 했으며, 그 약속을 얼마나 실천했는가이다.

민주주의에서 권력은 화려한 무대 위에서 탄생하지 않는다. 투표를 통해 부여되고, 행정을 통해 증명된다.

취임식은 하루의 행사지만 시정은 4년의 책임이다.

정치학에서는 장소와 연출, 의전과 상징을 활용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을 '상징정치'라고 부른다. 때로는 이러한 상징이 시민에게 희망과 비전을 전달하는 긍정적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상징은 어디까지나 본질을 담는 그릇일 뿐, 본질 자체가 될 수는 없다.

공직은 보여주는 자리가 아니라 일하는 자리다.
시장에게 필요한 것은 조명이 비추는 무대가 아니라 시민의 삶을 비추는 행정이다. 시민보다 먼저 출근하고 시민보다 늦게 퇴근하며, 하루하루 맡겨진 시간을 시민을 위해 사용하는 것, 그것이 시장의 진정한 취임식이다.

공자는 《논어》 안연편에서 말했다.
"정자정야(政者正也). 자솔이정(子帥以正)하면 숙감부정(孰敢不正)."
"정치란 바르게 하는 것이다. 지도자가 먼저 바르면 누가 감히 바르지 않겠는가.“

정치의 본질은 화려한 연출이나 상징이 아니라 스스로를 먼저 바로 세우는 데 있다.

시민은 취임식의 무대를 오래 기억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장이 남긴 행정은 오래 기억한다. 화려한 출범은 잠시 박수를 받을 수 있지만, 좋은 행정은 오랫동안 존경을 남긴다.

결국 공직자의 품격은 취임식의 규모가 아니라 퇴임식에서 시민이 보내는 박수의 크기로 완성된다. ]]></description>
<author>서용찬  기자</author>
<pubDate>Fri, 26 Jun 2026 11:26:49 GMT</pubDate>
</item>
<item>
<title>[오늘의 칼럼] 교황은 없고 계파만 남았다</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78235838387506016</link>
<description><![CDATA[거제시의회 후반기 의장단 선거를 앞두고 더불어민주당이 의장 후보와 상임위원장 후보를 미리 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정당정치의 현실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다수당이 원활한 원 구성과 의회 운영을 위해 사전에 조율하는 것은 어느 정도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문제는 따로 있다.

정당이 사실상 의장과 상임위원장을 내정할 것이라면, 왜 의회는 여전히 '교황식 선출방식'이라는 외형을 유지하고 있느냐는 점이다.

<b>교황식 선출방식이란 무엇인가</b>

지방의회 의장 선거는 원칙적으로 의원들이 본회의장에서 무기명 투표를 통해 의장과 부의장을 선출한다. 후보 등록 절차가 없거나 형식적이고, 정견 발표나 공개 토론 없이 의원들끼리 물밑 협상을 통해 표를 행사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언론과 정치권에서는 오래전부터 이를 '교황식 선출방식'이라고 불러왔다. 추기경들이 콘클라베에서 교황을 선출하듯 누가 후보인지, 어떤 비전을 갖고 있는지 공개되지 않은 상태에서 비밀투표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파 간 자리 나눠먹기나 사전 담합 논란이 반복되면서 "교황은 없고 계파만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애초 취지는 정파를 초월한 인물을 선출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시민들이 후보의 자질과 정책을 검증할 기회조차 없는 '깜깜이 선거'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b>법은 이미 길을 열어 놓았다</b>

흥미로운 사실은 지방자치법이 반드시 현재와 같은 방식만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법제처는 지방의회가 회의규칙을 통해 후보자 사전등록, 정견발표, 토론 등을 포함한 경선제를 도입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석했다. 무기명투표는 투표 방법일 뿐이며, 후보 검증 절차를 공개적으로 운영하는 것은 지방자치법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즉 ▲후보 등록 ▲정견 발표 ▲공개 토론 ▲정책 검증을 거친 뒤 최종적으로 무기명투표를 실시하는 것은 현행 법체계 안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전국 상당수 지방의회는 이미 후보 등록제와 정견 발표 제도를 회의규칙에 반영해 운영하고 있다. 교황식 선출방식이 반드시 법적 필수사항은 아니다. 

<b>정당이 결정할 거라면 차라리 제도화하라</b>

지금의 가장 큰 문제는 현실과 제도가 따로 논다는 점이다.
현실에서는 다수당 의원총회에서 의장과 상임위원장을 사실상 결정한다.

그러나 본회의장에서는 마치 의원 개인의 자유로운 판단에 따라 선출되는 것처럼 무기명투표를 실시한다.

결과적으로 시민은 누구를 왜 뽑는지 알 수 없고, 의원들은 공개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다.
만약 정당이 의장 후보를 추천하는 것이 현실이라면 차라리 이를 공식화하는 것이 더 솔직한 방법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의장 후보 등록 의무화 ▲후보별 정책공약 제출 ▲공개 정견 발표 ▲상임위원장 후보 공개 추천 ▲교섭단체 추천 절차 명문화 등을 회의규칙이나 조례에 반영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

국회도 원내대표와 상임위원장을 공개적인 절차를 통해 선출한다. 지방의회만 유독 밀실 정치의 관행을 유지해야 할 이유는 없다.

<b>의장은 시민의 대표이지 당의 대표가 아니다</b>

지방의회 의장은 정당의 원내대표가 아니다.

의장은 의회를 대표하고 회의를 주재하며 의원 전체의 권익을 보호해야 하는 자리다. 다수당 소속으로 선출되더라도 당의 이해보다 의회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우선해야 한다.

그렇다면 시민은 최소한 의장이 되려는 사람이 어떤 철학과 비전을 갖고 있는지 알 권리가 있다.

누가 어느 계파인지보다 중요한 것은 누가 의회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다.

후보도 공개하지 않고, 토론도 하지 않고, 정견 발표도 없이 진행되는 선거는 민주주의의 형식만 남은 절차에 불과하다.

<b>이제는 원 구성보다 원칙이 중요하다</b>

이번 거제시의회 의장단 선거가 특정 정당의 후보 확정 여부를 넘어 지방의회 민주주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정당이 미리 의장단을 정할 것이라면 그 절차를 공개하고 제도화해야 한다.

반대로 의원 개개인의 자유로운 판단에 맡길 것이라면 정당의 사전 내정부터 중단해야 한다.

지금처럼 당에서 결정하고 본회의에서 추인하는 방식은 책임도 없고 투명성도 없다.

교황식 선출방식이 문제가 아니라, 교황식이라는 이름 아래 밀실정치가 반복되는 것이 문제다.

거제시의회가 진정으로 시민에게 신뢰받는 의회가 되려면, 이번 원 구성 논란을 계기로 의장단 선출 규칙부터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지방자치 30년이 넘은 지금, 의장 선거만큼은 더 이상 '깜깜이 콘클라베'여서는 안 된다]]></description>
<author>서용찬  기자</author>
<pubDate>Thu, 25 Jun 2026 12:33:03 GMT</pubDate>
</item>
<item>
<title>[오늘의 칼럼] 삵과 파락호</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78226502587499016</link>
<description><![CDATA[사람은 흔히 가진 것의 많고 적음으로 자신과 타인을 평가한다.
누구는 큰 집에 살고, 누구는 작은 집에 산다. 누구는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있고, 누구는 그렇지 못하다. 

그러나 삶을 오래 들여다보면 사람을 가르는 기준은 재산이나 직업보다 다른 곳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일이 있는 사람과 일이 없는 사람.
계획이 있는 사람과 계획이 없는 사람.
그리고 계획을 실천하는 사람과 생각만 하는 사람.
삶의 격차는 대개 여기서 시작된다.

김동인의 소설 《붉은 산》에 등장하는 삵은 마을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인물이었다. 술을 마시고 싸움을 일삼는 문제아였다. 오늘의 기준으로 봐도 모범적인 인간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그는 달랐다.

모두가 침묵할 때 행동했다.
모두가 두려워할 때 앞으로 나섰다.
삵은 성공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세상에 순응하며 살아간 인물도 아니었다. 그는 적어도 자신의 삶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 행동할 때 행동했고 책임질 때 책임졌다.

흥선대원군 이하응 역시 비슷한 점이 있다.

그는 훗날 조선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지만 젊은 시절은 초라했다. 왕족이었지만 권력과는 멀었고, 가난과 멸시 속에서 살아야 했다. 사람들은 그를 파락호라 불렀다. 세도가의 문전에서 조롱받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잊지 않았다.
삵이 행동의 인간이었다면 이하응은 준비의 인간이었다.

삵이 몸으로 세상에 맞섰다면 이하응은 때를 기다리며 자신을 단련했다.
둘은 전혀 다른 길을 걸었지만 공통점이 있다.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반면 오늘의 우리는 어떤가. 노력보다 위안을 먼저 찾고 있지는 않은가.
계획보다 만족을 먼저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은가.

"큰 집은 필요 없다."
"소파 하나 놓을 공간이면 충분하다."
"욕심 없이 살겠다."
그 말이 진정한 삶의 철학이라면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때로는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변명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소파 하나면 된다고 말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 소파를 둘 수 있는 거실을 마련하기 위해 누군가가 얼마나 오랜 세월 일하고, 저축하고, 포기하고, 계획하며 살아왔는지는 잘 보지 않는다.

결과는 부러워하면서 과정은 외면한다.
삶은 의외로 정직하다.

오늘의 선택이 내일의 환경이 되고, 오늘의 습관이 몇 년 뒤의 운명이 된다.계획 없는 삶이 위험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무계획은 단순히 미래를 준비하지 못하는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멈춰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다.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데, 정작 본인은 아무 문제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흘러간다.
심리학은 인간의 중요한 능력 가운데 하나로 자기효능감을 이야기한다.

나는 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 믿음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고,
실패하고,
다시 일어서는 경험 속에서 만들어진다.

취미도 마찬가지다.
취미는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을 마친 사람에게 취미는 휴식이지만, 해야 할 일을 외면하는 사람에게 취미는 도피가 될 수 있다.

삵은 행동했다.
이하응은 준비했다.
둘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공통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남에게 맡기지 않았다.
인간은 환경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의지의 산물이기도 하다.
의지는 기적을 만들지 않는다.

대신 하루를 바꾸고,
하루는 한 달을 바꾸고,
한 달은 인생을 바꾼다.
삶은 결국 거창한 재능의 경쟁이 아니다.

오늘 해야 할 일을 알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
내일을 준비하는 사람과 오늘만 소비하는 사람의 차이,
그리고 계획을 실천하는 사람과 생각만 하는 사람의 차이가 쌓여 인생이 된다.

삵과 파락호.
한 사람은 행동으로 살았고, 한 사람은 기다림으로 살았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역사와 문학에서 끝내 배우게 되는 가장 오래된 교훈인지도 모른다.
인생은 결국 의지의 예술이다.
]]></description>
<author>서용찬  기자</author>
<pubDate>Wed, 24 Jun 2026 10:37:05 GMT</pubDate>
</item>
<item>
<title>'협치와 탕평', 거제 정치가 다시 배워야 할 오래된 지혜</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78186588587488016</link>
<description><![CDATA[19일 거제시청에서 국비 확보와 현안사업 추진을 위한 정책소통 간담회가 열렸다. 

변광용 거제시장과 거제시 간부공무원들, 그리고 국민의힘 서일준 국회의원이 한자리에 모여 내년도 국비 확보 방안과 지역 현안을 논의했다. 

서 의원은 이날 자신의 SNS를 통해 “거제 발전을 위한 다양한 의견을 나눴다”고 밝혔다.

어쩌면 특별할 것 없는 일정일 수 있다. 지방자치단체장과 지역구 국회의원이 만나 예산과 사업을 논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의 정치 현실을 생각하면 그 당연함이 오히려 특별하게 다가온다.

거제시장은 더불어민주당 소속이고, 국회의원은 국민의힘 소속이다. 정치적 경쟁 관계에 있는 두 사람이 한자리에 앉아 지역 현안을 논의했다는 사실 자체가 적지 않은 상징성을 갖는다.

정치는 본래 경쟁이다. 
그러나 행정은 경쟁이 아니라 협력이다. 

선거가 끝난 뒤에도 상대를 적으로만 바라본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시민에게 돌아간다. 그래서 지금 변광용 시장에게 필요한 첫 번째 덕목은 협치(協治)다.

협치란 말 그대로 함께 협(協), 다스릴 치(治)다. 서로 다른 정치 세력이 공동의 목표를 위해 힘을 모으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협치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에 가깝다. 

국민의힘 국회의원과 민주당 시장이 서로를 경계하는 것까지는 정치의 영역이다. 하지만 지역 발전이라는 과제 앞에서조차 등을 돌린다면 그것은 정치가 아니라 직무유기다.

조선시대 정조는 즉위 후 끊임없이 붕당정치의 폐해를 걱정했다. 노론과 소론, 남인과 북인이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면서 국정은 실종되고 당파 싸움만 남았기 때문이다.  

정조는 공론과 사론을 엄격히 구분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한 공적인 논의는 존중했지만, 당파와 계파의 이해관계를 앞세운 사적인 논리는 경계했다.

오늘날 정치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당이 시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이 정당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거제 역시 마찬가지다. 국비 사업 하나를 따오는 일도 결국 중앙정부와 국회, 지방정부가 함께 움직여야 가능하다. 도로와 철도, 산업과 관광, 교육과 복지 어느 것 하나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시장이 국회의원을 외면하거나 국회의원이 시장을 견제 대상으로만 본다면 결국 잃는 것은 거제의 미래다.

정치권에서 흔히 말하는 ‘패싱’이라는 단어가 있다. 일부러 배제하고 건너뛰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당 시장이 국민의힘 국회의원을 패싱해서도 안 되고, 국민의힘 국회의원이 민주당 시장을 패싱해서도 안 된다. 시민들은 정치적 자존심 싸움에 관심이 없다. 오직 누가 거제의 이익을 더 많이 가져오는지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협치가 대외적인 과제라면 변광용 시장에게 필요한 또 하나의 덕목은 탕평(蕩平)이다.

탕평은 조선 영조가 내세운 통치 철학으로 잘 알려져 있다. 탕평이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게 인재를 등용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탕평이 단순히 인원을 골고루 나눠 쓰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탕평의 본질은 균형이 아니라 적재적소다. 내 사람이냐 남의 사람이냐가 아니라 그 자리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 누구냐를 묻는 것이다.

흔히 정권이 바뀌면 사람부터 바뀐다. 선거를 도운 사람, 같은 계파 사람, 같은 정치적 노선을 가진 사람들이 중용된다. 그러나 행정은 선거의 연장이 아니다. 행정은 결과로 평가받는다.

시장에게 필요한 것은 충성 경쟁이 아니라 성과 경쟁이다. 내 편을 챙기는 인사가 아니라 시민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사람을 발탁하는 인사다. 시민들이 원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당나라 태종은 위징이라는 신하를 중용했다. 위징은 원래 태종의 정적 편에 섰던 인물이었다. 

주변에서는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태종은 달랐다. 그는 위징을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 삼았다. 태종 치세가 중국 역사상 최고의 태평성대로 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다.

지도자가 성공하는 길은 내 편만 곁에 두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까지 품을 때 조직은 건강해진다.

변광용 시장의 세 번째 임기가 시작된다. 선거는 끝났고 이제 행정의 시간이 시작됐다. 

시민들은 더 이상 민주당 시장인지, 국민의힘 국회의원인지를 따지지 않는다. 누가 더 많이 싸웠는지가 아니라 누가 더 많은 성과를 냈는지를 기억한다.

협치는 상대를 인정하는 정치의 지혜다. 탕평은 능력을 인정하는 행정의 원칙이다. 그리고 그 두 가지가 만나는 지점에 시민의 이익이 있다.

결국 거제 정치가 나아가야 할 방향도 거창하지 않다. 정당보다 시민을 먼저 생각하고, 사람보다 일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수백 년 전 영조와 정조가 고민했던 문제의 답이 오늘 거제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다. 시민은 승자의 정치가 아니라 성과의 정치를 기다리고 있다.]]></description>
<author>서용찬  기자</author>
<pubDate>Fri, 19 Jun 2026 19:44:45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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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흥남철수가 낳은 아들, 거제를 기억하다”</title>
<link>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aid=178185031387486016</link>
<description><![CDATA[오는 26일 개관하는 거제 흥남철수기념관에 문재인 전 대통령이 참석할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거제시는 최근 문 전 대통령에게 공식 초청장을 발송했다. 참석 여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문 전 대통령과 흥남철수작전의 인연을 고려하면 이번 개관식은 단순한 지역 행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흥남철수는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12월 함경남도 흥남항에서 민간인과 군인 등 9만8000여 명을 남쪽으로 탈출시킨 대규모 해상 철수작전이다. 

그 가운데 미군 수송선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1만4000여 명의 피란민을 태우고 장승포항에 입항했다.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이뤄진 이 작전은 오늘날까지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린다.

문 전 대통령의 부모 역시 이 역사적 탈출 행렬에 몸을 실었던 흥남 피란민이었다. 

함경남도 출신인 그의 부모는 전쟁을 피해 남하했고, 거제도 피란민 수용시설에서 정착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문 전 대통령은 1953년 거제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부산으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점에서 장승포항에 문을 여는 흥남철수기념관은 문 전 대통령 개인의 가족사와도 맞닿아 있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흥남철수가 없었다면, 그리고 장승포항이 피란민을 품어주지 않았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한 생애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흥남철수기념관이 들어선 장소 역시 의미심장하다. 옛 장승포 여객선터미널을 리모델링한 기념관은 피란민들이 새로운 삶의 터전을 향해 첫발을 내디뎠던 장승포항을 바라보고 있다. 

건물 내부에는 흥남철수작전과 피란민들의 삶을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재현한 11개 전시공간이 조성됐다.

이번 개관식에는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타고 장승포항에 도착한 날 태어난 이른바 ‘김치 베이비(Kimchi Babies)’들도 참석한다. 흥남철수의 기적을 몸으로 증언하는 생존의 상징들이다.

김치 파이브로 불리는 이들 중 이경필 장승포가축병원장은 거제를 떠나지 않았다.  

만약 문 전 대통령이 참석한다면 그는 또 다른 의미의 ‘흥남철수의 산 증인’이 된다. 직접 배를 타고 내려오지는 않았지만, 그 작전이 만들어낸 삶의 결과물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기 때문이다.

흥남철수기념관 개관은 단순히 전쟁사를 전시하는 사업이 아니다.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도 인간의 생명을 구해낸 인도주의 정신을 기억하는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그 역사 한가운데에는 흥남에서 거제로 내려온 한 피란민 가족의 이야기가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참석 여부에 관심이 모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흥남철수는 한국 현대사의 기적이었고, 문 전 대통령은 그 기적이 남긴 가장 상징적인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description>
<author>서용찬  기자</author>
<pubDate>Fri, 19 Jun 2026 15:25:13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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